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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 난장 70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듣기만 하던 철규가 물었다.

"장삿길은 일 년 전부터 나섰겠네?" "아닙니다.

지난 해 늦여름부터니까 육 개월 정도 됐습니다.

선배님들도 경험이 있을테지만, 저도 처음엔 흔한 옷장사부터 시작했었어요.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까,가는 장터마다 워낙 옷장수가 많은데다가 도대체 신명풀이할 일도 없었어요. 결국은 한 달만에 집어치우고 토산품으로 바꿔버렸지요. 하지만 잡곡이나 약초 같은 품목도 종일 혀가 닳도록 팔아봤자, 입안에 마른침만 돌고 허기만 졌지 이문은 보잘것없죠. 하지만 토산품으로 바꾸고 나니까 가짜 외국상표투성이인 옷장사보다 마음도 편안해지고 자연 말이 많아지데요. 돈이야 벌리든 안 벌리든 일단 장터바닥으로 나선 이상, 종일 지껄여야 속이 시원하거든요. 물론 잡념도 없어지고요. " "자넨 역마살을 끼고 태어난 팔자군. 그러나 자네가 장바닥으로 전전하면서 나간다타령이나 부르고 다닌다는 것을 자네 집에서 알고나 있을까? 십중팔구 모르고 있을 테지. 모자를 눌러 쓰고 다니는 까닭도 그 때문이겠고. 하지만 자네같이 허우대 준수한 젊은이가 속에서 끓어오른다는 신명을 주체 못해 신세 조져버린 것 같은데…. 강원도 산 골난전판 먼지바닥이나 뒹굴면서 영지버섯이나 팔려고 멀쩡한 대학4년 댕긴 사람은 자네로서 처음 보았네. 아무튼 세상 오래 살다보면 보는 것 많아 좋겠군. 아이에프인지 어른에프인지 무슨 놈의 한파라더니 요사이도 저런 젊은이가 있다는 게 그럴싸하기도하고 요상하기도 해서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구만. " "형님요. 젊은 사람의 행세가 다소 밉상이라 카디라도 시종 삐딱하게 비틀어 물어야 속이 시원하겠습니껴? 개를 쫓아도 구멍을 두고 쫓으라 했습니더. 그렇게 매찰없이 쥐어박으면, 서러운 사람은 태호뿐이 아입니껴. 영지버섯도 소매만 한다면 보기에 다소 딱할지는 몰라도 도매장사를 한다 카면, 대학4년 나와서 못할끼 뭐라요. " "하긴 임자 말도 그럴듯해. 산골동네에서 살고 있는 똥개 평생소원은 제발 꿈에 호랑이 안 보이는 것이고, 다방 레지 평생소원은 오줄빠진 사내자식 하나 물어서 번듯한 다방 차리고 주인행세 하는 건데, 이 사람도 평생 장꾼으로 늙어 죽을 생각이야 없겠지. 그래 영지버섯 도매상 해서 자수성가하면, 뭘 하려나?" "저라구 목표가 왜 없겠어요. 그러나 아직은 발설할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종잡을 수 없는 것은 비아냥거리는 말인지 부추기는 말인지 감을 잡을 수 없는 변씨와 봉환이가 이죽거리고 있는 말들 같아서 철규도 태호를 따라 웃고 말았다.

태호가 주섬주섬 일어날 채비를 하였다.

식대를 치르고, 밖으로 나서는데, 장릉 맞은편 산구릉 위로 둥근달이 떠올라 있었다.

태호가 손으로 달을 가리키며 말했다.

"단종 임금 서럽게 울고 있으시네요. " 봉환이와 변씨가 동승하고 철규는 태호의 차를 타기로 하였다.

영월에서 평창까지는 30㎞ 남짓, 자동차로는 줄잡아 한 시간 거리였다.

장릉 앞을 벗어나자, 곧장 울창한 노송숲이 나타났다.

소나무 가지에 운치있게 걸려 있던 달이 그들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홍살문을 지나고 소나기재의 마루 위로 올라서자, 달은 소나무 가지를 훌훌이 뿌리치고 벗어나 중천 저만치로 시원스럽게 떠올라 있었다.

태호는 그 달을 살피느라 차창 위쪽으로 고개를 디밀어 올리곤 하였다.

철규는 차창을 내리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운전석으로 몰려드는 바람에서 그는 문득 봄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서울에선 잡지나 신문으로 봄을 느껴 왔었다.

느껴 왔다기보다는 그런 잡지들이 마련한 특집물을 통해서 계절의 간격을 제것인 것처럼 모사 (模寫) 하며 살았던 것이었다.

서울생활 모두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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