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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에서]'주미대사'란 자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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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홍구 (李洪九) 한나라당 고문이 주미 (駐美) 대사로 내정됐다.

대통령의 선택을 야당인사 발탁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지만 그는 역대대통령들 가까이에 있었으면서도 특정정파의 색깔을 드러내는 행태를 즐기지 않았던 인물이다.

새 정부의 첫 주미대사로 부임할 李전총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대미 (對美) 관계에서의 합리성과 유연성이다.

마침 주변에서 얘기하는 그의 개인 덕목과도 맞아떨어진다.

지난 반세기 동안 부침 (浮沈) 은 있었지만 미국이란 존재는 여전히 우리에게 묘한 대상으로 투영되고 있다.

절대 멀리할 수 없는 존재로되 그렇다고 미국을 안다고 행세하는 누구에게도 '친미 (親美) 인사' 란 칭호는 부담스러운 대상이 미국이다.

그리고 미국을 보는 우리의 착시 (錯視) 증상은 핵문제를 계기로 북한이란 존재가 미국의 레이더 망에 잡히면서 심해졌다.

게다가 향후 한.미 양국간 신경전의 상당부분이 북한이란 상대를 둘러싸고 벌어질 가능성마저 있다.

미국을 너무 잘 알고 또 남북문제를 깊이있게 다뤄 본 인물이 한국 새 정부의 대미활동에 야전사령관을 맡게 된다는 사실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김대중 (金大中) 정부에 대한 미국의 기대가 대단하고 경제난 극복이란 지상과제가 주어진 상황에선 신임대사의 할 일이 상당부분 정해져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미국의 기대나 우리의 경제문제가 다분히 지난 정권의 유산이란 점에서 신임대사는 심리적으로 과거와의 단절이란 부담을 안고 출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李대사의 과제는 과거와의 결별을 넘어서 양국관계를 정상궤도에 안착시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대통령과 교감을 나누며 양국관계의 성격을 재음미해보는 다소 철학적인 성찰도 요구된다.

미국의 월터 먼데일 전 부통령은 주일 (駐日) 대사직을 맡자마자 사무실과 관저에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핫 라인' 을 개설했고 주요 경제부처 장관들과의 직통전화도 설치했다.

서울과 워싱턴 사이에 평소 수많은 교신이 오가지만 중요한 사안에 대해선 주미대사와 대통령간에 직접대화가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경제난 극복에 미국의 비중을 인정한다면 주미대사가 국내 경제부처 인사들이나 기업인들과 직접 얘기할 수 있는 창구도 늘 열려 있어야 마땅하다.

새 정부가 나라안팎의 높은 기대속에 부담을 안고 출범했듯이 신임 주미대사도 양국관계를 한단계 끌어올리는 데 최적임자라는 가볍지 않은 축복속에 워싱턴을 향한다.

길정우〈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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