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석 칼럼]不善의이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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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로렌스 서머스 미국 재무부 부 (副) 장관이 한국의 통화.금융 재난을 '밤늦게 자동차가 빗길에 미끄러지는' 대형 교통사고에 비유한 것은 새겨들을 만하다.

원인이 복합적이기 때문에 책임규명이 어렵다는 것을 말하려고 끌어댄 비유였다.

역경 (易經)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불선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앙화가 있다.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 일을 일조일석에 생기는 사고라고 볼 수는 없다.

오랫 동안 불선이 쌓인 결과다.

일찌감치 이를 제대로 판단해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사고다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臣弑其君 子弑其父 非一朝一夕之故 其所由來者漸矣 由辨之不早辨也) ." 여기서 불선 (不善) 이라고 뭉뚱그린 것이야말로 서머스 부장관이 말하는 교통사고의 원인이다.

운전자의 잘못, 길의 안전성 미달, 자동차의 결함이 장기복합화 (長期複合化) 한 것이 불선이다.

비가 내렸다는 것은 이 사고의 원인에서 제외돼야 한다.

비가 내려도 안전하게 달릴 수 있는 운전자, 자동차, 도로설비의 위험대비와 품질등급이라야 그것을 선 (善) 이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나라 정치에서는 사고의 원인규명이 매우 쉽고도 분명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쪽편' 이냐 아니냐를 지배적 판단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쪽편' 이 아닐 때 거의 유일하다시피 작용하는 것은 '복수 (復讐) 의 원칙' 이다.

그러기 위해 모든 재앙은 구체적 인물인 운전자의 잘못으로 돌린다.

전부총리 강경식 (姜慶植) 씨도 그런 운전자라고 서머스는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운전자에 해당하는 사람을 쉽사리 발견하기 어려울 때는 구성 (構成) 해 낸 운전자를 대입 (代入) 하기까지 한다.

사고까지 새로 구성해 낼 정도로 복수의 원칙을 치열하게 완수하는 경우도 있다.

이쪽편이 운전자였을 때는 비가 내렸다는 것이 사고의 원인으로 규명되는 가장 인기있는 항목이다.

만일 저쪽편에게 이쪽 탓으로 돌릴 빌미를 줄 염려만 없다면 자동차나 도로의 불량도 훌륭한 원인이 된다.

이때는 '남의 탓 원칙' 과 '음모론' 이 지배한다.

사고를 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들켰다는 것이 문제가 될 때도 많다.

들킨 것 자체를 저쪽 편의 음모로 몰아붙인 경우로는 92년 대선때의 '초원복집 사건' 이 있다.

이 정치적 마술을 구경하면서 감탄에 겨운 박수를 보낸 관중과 해설자들도 많이 있었다.

민중은 이런 복수에서 대리만족을 느낀다.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 작용처럼 복수극도 그것이 사고의 원인을 정당하게 밝힌 것이든 아니든, 황차 사고를 다시 나지 않게 하는 원인의 발견이나 치료와 전혀 무관한 것이더라도, 거기서 한줌쯤의 만족을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사고가 너무 크고 거기서 받은 분노 아닌 고통이 현재까지 뻗쳐 민중을 짓누르고 있는 경우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복수극에 의한 대리만족 사업은 과거로서 끝난, 그리고 비교적 소규모의 고통과 분노를 삭이는 데만 효과가 국한되는지도 모른다.

특히 그 고통이 경제적인 현재일 때는 배고픈 젖먹이가 젖만 바라듯 시간이 갈수록 굿구경 아닌 해결과 구제를 더 강하게 지속적으로 요구하게 된다.

'유러머니 (Euromoney)' 3월호는 한국의 통화.금융 '교통사고' 직후 IMF 등의 긴급구제, 국제 금융기관의 만기연장과 단기채 중기화 (中期化) 를 연출한 것이 미국 재무부였다고 밝히고 있다.

아마 서머스 부장관이 그 감독이었을 것이다.

한국정부는 적당한 외국인 변호사를 찾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외국기관 아닌 한국정부가 해야 할 일이 지금 남아 있다.

이 일을 '제대로 빨리 판단하지 못하는 판단 (辨之不早辨)' 이야말로 모두 역경이 말하는 불선이다.

길.자동차.운전자를 빨리 제대로 바로 잡기는커녕 사고기업.사고은행 등 널부러져 있는 교통사고 현장마저 그대로 놓아둔 채 결과적으로 '권영해 (權寧海) 할복' 따위 다른 종류의 '교통사고' 마저 추가하는 정치를 하고 있다가는 이 불선 때문에 경제적 '교통사고' 가 더욱 심각해져 그에 따른 민중의 고통은 계속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불선의 이름을 제발 개혁 (改革) 이라고 달지는 말기 바란다.

개혁에 복수하려는 반대세력이 장차 일어난다면 '교통사고' 의 원인이 더욱 복잡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강위석〈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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