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안정적 여소야대의 구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새 정부 출발부터 정국이 꼬이고 있다.

경제위기가 정치권으로 하여금 그들간의 정쟁 (政爭) 을 뒤로 미루고 나라살리기 경쟁에 나서게 할 것이라는 국민의 기대는 무너졌다.

정치권이 총리인준을 둘러싼 힘겨루기, 북풍공작 공방으로 날을 새는 동안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국정 논의는 실종돼 버렸다.

외국 자본은 새 정부의 리더십에 의문을 던지며 투자를 주저하고 있고, 경제구조조정과 그에 따른 보상을 마련하기 위한 조치들의 국회 통과가 지연되면서 국민들의 고통은 늘어가고 있다.

여소야대 (與小野大) 의 상황은 원내 소수파가 집권할 경우 예견됐던 것이다.

그런데 여당연합은 여소야대에 준비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권력이 자신들에게 넘어올 경우 거대 야당은 내부로부터 와해되거나 구심점을 상실한 채 집권 여당에 끌려다닐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나타났다.

한나라당은 대통령 취임식 후 바로 총리인준을 무산시킴으로써 외국 지도자들 앞에서 대통령의 지도력에 일격을 가했다.

왜 한나라당은 여론의 거센 비난에도 불구하고 새 정부의 발목을 잡는 '방해꾼 (obstructionists)' 의 역할을 자청하고 있는가.

한나라당의 첫째 과제는 조직으로서의 당을 유지하는 것이다.

원래 한나라당의 연원은 3당 합당으로 탄생한 거대여당인 민자당이다.

김영삼 (金泳三) 정권하에서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지난 대선 때 승리를 목적으로 민주당을 끌어들임으로써 이질성이 더 높아졌다.

한지붕 세가족이라는 이질적 정치집단의 불편한 동거가 계속된 것은 권력에 남아 누리는 이득이 동거의 불편함보다 컸던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대선에서의 패배로 그들을 묶어줄 수 있는 권력이 없어졌다.

더구나 지역적.이데올로기적으로 다양한 당내 세력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 구심점도 없다.

이와 같이 내부적으로 조직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취할 수 있는 것은 외부적 공세다.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는 전략을 채택한 것이다.

총리인준 거부를 통해 한나라당은 다수당으로서의 위력을 과시했다.

한나라당의 협력 없이는 정국을 운영해 갈 수 없음을 정부와 여당에 분명히 보여줬다.

이제 한나라당은 권력의 무게를 느껴야 할 것이다.

그들은 권력을 상실한 의미없는 정치세력이 아니라 엄연히 국회를 주도하고 있는 다수당인 것이다.

그러나 권력에는 책임이 따른다.

지금 한나라당은 과거 소수 야당의 사치를 누릴 수 없게 됐다.

과거 소수 야당은 정부와 여당에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해도 됐다.

그들이 반대하더라도 정부와 여당은 자신이 원하는 정책을 통과시킬 수 있었고, 그 모든 책임은 정부와 여당에 귀결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내 다수당으로서의 한나라당은 국가정책결정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정부와 여당에 전가할 수 없게 됐다.

그러나 동시에 한나라당의 힘 과시는 여권에 인위적인 정계개편을 시도하도록 유혹하고 있다.

인위적으로라도 다수를 만들지 않고서는 국정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위적 정계개편을 하지 않겠다는 공약을 파기하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그 공약을 깬다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국민이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을 선택한 것은 여소야대하의 대통령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나라당은 '방해꾼' 의 역할을 버리고 자신들이 가장 통치에 적합한 수권정당임을 보여주는 정책경쟁에 들어가야 한다.

통치경험이 풍부한 한나라당 의원들의 정치적 자산을 낭비해선 안된다.

미국 공화당의 소장의원들이 중심이 돼 '미국과의 계약' 이라는 정책 프로그램을 제시해 의회를 장악한 것과 같이 한나라당은 위기에 빠진 한국을 구출할 수 있는 정책대안을 제시해 재집권 기회를 노려야 할 것이다.

권력의 중앙을 향해 소용돌이치는 중앙집권적인 한국정치에서 대통령으로의 권력집중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소야대는 바람직한 측면이 있다.

여권은 여소야대의 구조를 깨 편하게 통치하려 할 것이 아니라 안정적 여소야대하에서 거대 야당과의 협상과 타협을 통해 국정을 운영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불편한 것이다.

그러나 불편한 가운데 발휘되는 민주적 리더십이야말로 강력한 리더십이다.

임혁백〈고려대교수·정치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