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강원도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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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영화를 탈 (脫) 신비화했구먼" '강원도의 힘' 시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시인 황지우가 단답식 정의를 내리듯 운을 뗐다.

이어 "지리멸렬하고 구차하며 권태로운 90년대식 일상이 잘 그려졌어" 라고 덧붙였다.

십년 아래인 후배를 향해 내뱉은 시인의 단 두 문장에는, 다소 빤한 표현이라는 느낌이 없진 않지만 홍상수감독 영화의 특색을 단박에 짚어주는 어떤 '시적 직관' 같은 게 묻어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강원도의 힘' 은 영화매체에 대한 신비감을 벗긴 작품은 아니다.

흔히 보아온 영화들과는 다른 '낯선 영화' 또는 이질적인 영화라고 해야 사실에 더 근접한 표현이다.

그는 한국감독으로는 드물게 자기 미학을 가진 인물로 통한다.

스타배우에 의존하지 않고 낡은 드라마의 틀과 구성에 따르지 않으며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미세한 움직임들을 클로즈 업하면서 비관습적인 영화를 추구한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에서 선보였던 이같은 스타일은 두번째 영화에서도 그대로 재생되고 있다.

그래서 '돼지…' 를 만났을 때 받았던 충격을 다시 맛보고 싶은 이들에게 이번 작품은 새로운 요소가 덜해 싱거워 보이기도 한다.

또 전작보다 유머와 디테일한 묘사는 더 풍부해진 반면 페이소스는 현저히 떨어져있다.

가정을 가진 대학강사 남권과 그를 사랑했던 지숙. 두 사람이 같은 시간대에 같은 공간 (강원도)에 머물면서도 서로 엇갈린 채 각자의 감정을 추스리는 과정이 두 부분으로 나눠져 평행하게 전개된다.

영화의 재미는 외국말로 번역됐을 때는 도저히 그 맛이 살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의 대사에 있다.

그것은 배우들의 개성있는 연기와 말투에 크게 힘입고 있기 때문에 활자로 옮겨도 그 향기를 제대로 전할 수 없어 인용이 의미가 없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일상적인 것들을 누적시킴으로써 영화적 의미를 드러내는데 홍감독 영화의 강점이 있다.

흉하게 생긴 덩치 큰 개가 무서워 비실비실 옆으로 피하는 주인공의 표정이나 비행기 티켓을 파는 항공사 여직원의 사무적인 목소리를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것등 장면들 하나하나가 인물의 성격에 입체감을 주고 현실을 풍자하는데 기여한다.

홍감독의 두 편의 영화를 보면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 '소매치기' '돈' 등에서 보여준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접근법이 떠오른다.

그러나 브레송은 가시적인 것의 축적을 통해 비가시적 존재, 즉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는 신이나 초월자의 존재를 모색했다.

반면 홍감독영화에는 '권태로운 일상' 의 풍경을 묘사하는 걸 넘어서는 현실에 대한 조망과 전망이 부족하다.

의미들이 단편적으로 소산 (消散) 해 버릴 뿐, 통일적으로 축조 (築造) 되지 않는 것이다.

표면에 흐르는 자잘한 것에만 매달리는 90년대식 쇄말주의. 홍감독이 피해가야 할 함정이 아닐까.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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