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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해법' 긴박했던 한·미] "미국 제안 통째로 거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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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대북 태도 돌변'. 미국 뉴욕 타임스는 지난달 24일자에서 미국이 처음으로 포괄적 북핵 해법을 낸 기사를 다루면서 이런 제목을 달았다. 북한이 먼저 핵을 폐기한 뒤 보상 논의가 가능하다는 강경 입장을 접고, 북한이 핵 폐기를 전제로 핵활동만 동결해도 상응조치를 하겠다고 한 데 대한 평가다. 미국의 이 제안으로 북핵 6자회담은 새 국면을 맞았다.

북한이 이를 일정부분 평가하면서 11월의 미 대선 전에 북핵 문제의 돌파구가 열릴 것이란 기대도 나온다. 최근 2차 남북 정상회담 개최설이 나오는 것은 이런 분위기와 맞물려 있다. 미국의 북핵 협상 카드 제시와 6자회담까지의 막후 외교 교섭을 추적했다.

◇"북.미 양측에 할 말은 하라"=5월 19일 저녁 청와대.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외교통상부 간부와 만찬을 하면서 북핵 문제와 관련한 지시를 내린다.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북핵 문제의 돌파구 마련을 강조한 지 이틀 만이다.

지시는 두가지였다. 하나는 "3차 6자회담이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미국에도 할 말은 하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회담의 장래가 어둡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대북 메시지였다. "북한에 대해서도 인상 쓸 것은 써야 한다. 시간 끌기는 안 된다는 것을 각종 남북 대화 채널을 통해 북한에 전달하라"는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일본을 통해 이런 뜻을 우회적으로 전한다. 5월 29일 청와대에서 가와구치 요리코 일본 외상을 만날 때였다. "일본 측은 미측이 북핵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는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는 6월 8일 미국 조지아주에서 열리는 G8(서방 선진 7개국+러시아) 회담에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회담하는 것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고 한다.

◇"동맹국의 아이디어를 듣겠다"= 6월 2일 워싱턴. "북핵 문제와 관련해 적극적이고 전향적이며 창의적인 접근 방안을 실무선에서 논의토록 하자." 권진호 국가안보보좌관은 미국의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게 노 대통령의 구상을 전한다. 라이스는 화답했다.

"동맹국의 아이디어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공식 협의를 하자." 라이스는 그러면서 한.미 NSC 간 협의를 제안했다. 이후 NSC 실무진 간 논의가 본격화한다. 권 보좌관을 수행했던 NSC 위성락 조정관과 박선원 국장은 귀국하자마자 9일 다시 워싱턴을 찾았다. 회의는 이틀간에 걸쳐 진행됐다.

우리 측은 NSC 북핵대책반과 외교부가 협의해 마련한 북핵 해법안을 미측에 내놓았다. 양측은 우리 측 안에 미측의 의견을 반영해 6개항의 '개념 문건'을 작성했다. 정부 당국자는 "견해 차이로 양측 간에 5시간에 걸친 논쟁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문건의 요체는 북한과 관련국 간의 '더 큰 교환'이었다. 우리 측이 제시한 '북핵 동결과 상응조치'안을 고쳐 북한의 핵 동결이 폐기로 이어지도록 분명한 조치를 추가하고 또 관련국의 상응조치도 늘리는 내용이었다. 미국은 이 문건에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CVID)라는 용어를 넣지 않는 데 동의했다. CVID는 북핵 정책과 관련한 부시 행정부의 전가의 보도였으나 처음으로 빠지게 된 것이다.

◇"김정일은 당신과 춤추고 싶어 한다"=일본도 움직였다. 6월 8일 미국 조지아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당신과) 목이 마르도록 춤추고 싶어 한다." G8 정상회의에 참석한 고이즈미 총리는 부시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5월 22일의 2차 방북 결과를 이렇게 설명했다. 2002년 9월의 1차 방북 때와 달리 북한의 자세에 변화가 감지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일본의 중재 역할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미국이 새 해법을 내자 대북 중유 지원 참가 의사를 밝힌다.

같은 시간 워싱턴. "우리는 북한의 우라늄 핵 프로그램에 대해 아는 바 없으며, 그것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방미 중인 저우원충(周文重)중국 외교부 부부장은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미국을 압박하는 폭탄 발언을 했다. 이 신문 23일자는 "미국의 해법 제시는 미국의 아시아 동맹국(한.일)과 중국의 압력에 대한 대응"이라고 전했다.

◇"이번 회담에서 긍정적 진전 이뤘다"=6자회담 이틀째인 6월 24일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 김계관 북측 수석대표는 "미측이 9개월 만에 문제 해결 '로정도(로드맵)'를 제시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측 대표단과 한 2시간30분 동안의 양자 접촉에서였다. 2002년 10월 북핵 문제가 다시 불거진 이래 북한이 이렇게 긍정적인 발언을 한 적은 없었다. 북한은 미국이 마침내 '북한과 대화는 하되 교섭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버린 것으로 판단했을 수 있다고 회담 관계자는 전했다.

이에 앞선 23일 저녁 중국 주최 리셉션. 우리 대표단은 북측 김계관 수석대표와 이근 차석대표에게 쐐기를 박는다. "미국 측이 안을 낸 것은 처음으로 북한과 춤추겠다는 것이다. 미측의 반응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불만이 있더라도 조문을 문제 삼아야지 통째로 거부하지는 마라." 북측은 이후 우리 대표단에 "이 안이 어떻게 나온 것이냐""어떻게 평가하느냐"를 꼬치꼬치 캐묻는다. 북한의 공식 반응은 회담이 끝난 지 이틀 뒤인 6월 28일 나왔다. 내용은 비판적 지지였다. "이번 회담에서는 …진전을 가져올 수 있는 일부 공통적인 요소도 찾아볼 수 있었다. 우리가 내놓은 '동결 대 보상' 문제를 기본으로 토의하는 데 대한 합의가 이룩된 것은 하나의 긍정적인 진전으로 된다."(외무성 대변인 담화)

오영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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