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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 난장 5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원양태와 연안태의 구분을 분명히 하는 솔직한 언변에 호감이 갔던지 지나는 길에 건성으로 값이나 물어보자 했던 부부는 두 코다리를 사서 배낭에다 집어넣으며 봉환을 보고 물었다.

"당신이 한철규란 사람이오?"

"아, 현수막에 쓴 이름의 주인공말입니껴? 한철규는 바로 저 분입니더. " 봉환은 마침 좌판 뒤쪽 연석선에 변씨와 나란히 쭈그리고 앉아 있는 철규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철규가 벌떡 일어서며 수인사를 올리자, 눈짓으로 인사를 받고 현수막 한편에 쓴 시구까지 읽어본 뒤 돌아섰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봉환이가 중얼거렸다.

"저 고객분들이 형님이 시인이라는 것을 대까닥 알아챈 눈치 아닙니껴? 역시 교양있는 사람들이 물건 값어치 알아채는 눈치도 빠른기라. " 자신들이 몰고온 승용차로 다가가고 있는 부부를 역시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철규가 마침 모닥불 피울 채비를 하고 있는 봉환에게 말했다.

"우리 좌판 거두는 게 좋겠어. " "형님 지금 뭐라습니껴? 좌판 거두자습니껴?" "그래, 좌판 거두자고 했어. "

"아까 먹은 해장국에 비상이 들어 있었나. 불각시에 웬 실성한 소리를 합니껴?"

"미친 소리가 아니야. 장터골목 보라구. 지금 시각이 열한시를 넘겼는데도 이십여명 되는 난전상들만 떨고 있었지 장꾼들 모습은 눈을 씻고 봐도 없지 않아. 여기 앉아 종일 떨어봤자, 우리 셋 일당은커녕 자동차 기름값도 날리고 파리만 날리겠어. 냉큼 뜨자구. " "지금은 한겨울이라서 파리 날릴 걱정은 접어두이소. 냉큼 뜨자면 도대체 어디로 뜨자는 겁니껴?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함부로 내뱉어도 되는 깁니껴?." "갈 곳이 있을 것 같아. " 줄곧 쏘아붙이며 투덜거리는 봉환을 부추겨 서둘러 좌판을 거두었다.

철규의 말대로, 그들이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봉평장은, 지난날의 애수가 담긴 이름과는 달리 애당초 가망이 없어 보였다.

철 지난 의류상인이나 붕어빵 장수들과 과일상인들이 골목에서 좌판을 펴고 장꾼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겨울 햇살이 따끈해진다 해도 매기 (買氣)가 살아날 조짐은 전혀 없었다.

철규의 뇌리를 스쳐간 무엇은 바로 그들에게 마수걸이를 해준 40대 부부를 발견하고부터였다.

그들은 부부가 탄 차가 사라진 둔내쪽 국도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봉편에서 곧장 홍정천을 가로지른 교량을 지나 8㎞를 달려갔더니, 자연석에 옥산대 (玉山垈) 라고 새긴 옛 지명이 나타났다.

그곳 대기산 자락에 훼미리마트라는 대형스키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에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산기슭을 타고 내리는 스키장에는 형형색색의 옷차림인 스키어들이 눈밭 위로 꽃잎을 뿌리듯 흩어지고 있었다.

초입길에 들어서고 나서야 철규의 속셈을 알아챈 두 사람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가슴이 두근거리긴 하였으나 막상 좌판을 펼 장소가 마땅하지 않았다.

스키장의 호텔 부근과 경내의 간선도로는 혀로 핥아놓은 듯 먼지 하나 없이 정돈되어 있었고, 교통정리요원들이 요소마다 배치되어 있어, 진흙탕을 뒤집어 쓴 용달차 한 대가 염치없이 나타나 경내로 들어서자, 곱지않은 시선으로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

여차하면 쫓아낼 조짐이었다.

궁리 끝에 초입의 길가에다 좌판을 펴고, 드나드는 관광객들을 겨냥하기로 했다.

드나들던 관광객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차에서 내려서기만 하면, 변씨와 봉환이가 악착같이 붙잡고 늘어졌다.

가슴이 두근거렸던 만치 매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명태의 담박한 맛을 기억하고 있는 40대 이상을 상대로 삼십 코다리나 팔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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