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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Knowledge <35> 2009년 부활한 작곡가 3인의 오해와 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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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이미 타계한 작곡가 세 명이 되살아온다. 헨델(서거 250주기), 하이든(서거 200주기), 멘델스존(탄생 200주년)을 기리는 음악회가 한창이다. 공연과 음반을 통해 올해 내내 계속 듣게 될 작품 주인공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각각 바로크·고전·낭만 시대를 대표하는 세 작곡가의 삶은 그 비중만큼이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오해도 생겼다. ‘2009년 작곡가 삼총사’의 삶을 오해와 진실로 풀어봤다.

김호정 기자

서거 250주기 헨델
‘음악의 아버지’는 자녀 20명이나 뒀지만…

음악의 ‘어머니’는? 학교에서 음악 수업을 제대로 들은 후 내놓을 정답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1685~1759)이다. 하지만 헨델의 삶에 비춰 이 별명은 근거가 불분명하다. 그는 바로크 시대 후반기를 살았던 작곡가다. 산고 끝에 한 시대 양식의 기틀을 다진 ‘어머니’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헨델은 오히려 바로크 시대 음악 양식을 마무리한 인물에 가깝다.

이 별명은 그의 작품이 여성 감수성에 기대고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하지만 그는 오페라 42편, 오라토리오(종교적 극음악) 29편, 칸타타(주로 합창으로 이뤄진 성악곡) 120곡을 남긴 ‘블록버스터’ 작곡가다.

‘어머니’는 동시대 작곡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와 대비하기 위해 억지로 만든 별명으로 추정된다. 이 둘을 ‘어머니’와 ‘아버지’로 만들면서, 두 거대한 음악가 산맥이 한 시대를 살았다는 점이 강조된다. 자식을 20명이나 둔 것으로 전해지는 바흐와 달리 헨델은 결혼조차 하지 않았으니, 노총각 처지에서 ‘어머니’라는 별명이 더욱 억울할지도 모른다.

유럽 왕실 넘나든 노총각 코스모폴리탄

유럽에서 헨델의 이름은 고유명사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영국에서는 ‘George Frideric Handel’로, 독일에서는 ‘Georg Friedrich H<00E4>ndel’로 다르게 쓴다. 국경을 허물며 국제적으로 활동한 ‘코스모폴리탄’이었기 때문이다.

독일 할레에서 태어난 그는 주로 이탈리아식 음악을 작곡했고, 영국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독일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영어를 섞어 농담을 구사했던 이 다국적 작곡가를 각 나라는 애정으로 대했다.

독일과 영국 사이에서 ‘스카우트 경쟁’에 휘말렸던 에피소드도 남기고 있을 정도다. 독일 하노버의 선제후인 조지 1세의 전속 음악가로 일하던 헨델은 갑작스레 영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영국 여왕의 총애를 받으며 경력을 쌓던 중 이전 직장의 ‘상사’ 조지 1세를 다시 만날 일이 생긴다. 영국 여왕이 사망한 후 조지 1세가 영국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 그와의 관계 복원을 위해 헨델이 작곡한 곡이 왕의 뱃놀이에 쓰이는 ‘수상 음악’이다. 이쯤 되면 음악가로서 ‘해외 진출’의 ABC를 알았던 인물이라 칭할 만하다.

서거 200주기 하이든
교향곡만 100곡 넘어 … 그는 ‘작곡 기계’?

베토벤은 9곡의 교향곡을 남겼다. 모차르트는 41곡에다 어린 시절에 만든 작품 9곡이 더 있다.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1732~1809)의 교향곡은 번호가 붙은 것만 104곡이다. 이런 다작(多作)이 결정적 걸작의 탄생을 막는 걸림돌이 됐다는 지적도 있다. 베토벤 교향곡 9번과 같은, 강력한 ‘한 곡’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이든의 생애를 살펴보면, 이렇게 많은 작품을 만들어야 했던 배경과 그 이면의 싸움이 보인다.

하이든은 17세에 소년 합창단에서 쫓겨났다. 본의 아닌 ‘프리랜서’ 생활 8년을 마치고 드디어 궁정 악사로 취직한 후의 업무량은 어마어마했다.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 일하게 된다. 쏟아지는 작곡 의뢰를 맞추는 것은 물론 오케스트라를 훈련시키는 것 모두 그의 몫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쓰고 싶은 작품을 작곡가로서 발표하는 것은 그가 항상 품었던 꿈이었다.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세대가 바뀌면서 그는 잠시 휴가를 얻는다. 이때 다소 온전한 ‘프리랜서’로 활동하던 자유로움을 그는 네 곡의 ‘런던 시리즈’로 발표한다. 놀람·군대·북소리·런던 교향곡과 집시 피아노 트리오 등은 음악가로서의 찬란한 기쁨을 담고 있는 ‘결정적 명곡’들이다.

음악으로 청중과 장난 좋아한 유머 달인

‘고별’ 교향곡은 하이든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궁정에서 계속되는 연주회로 지친 교향악단 단원들이 ‘휴가 좀 보내 달라’는 메시지를 음악으로 전달하게끔 작품을 만들었다. 4악장에서 음악은 갑자기 마지막 인사를 고하는 듯 느려진다. 그리고 목관 악기를 연주하는 단원부터 차례로 자리를 뜨기 시작한다. 연주가 진행되는 것을 무시하고 단원들은 하나둘 무대 밖으로 사라지고, 마지막에는 지휘자와 바이올린 연주자 두 사람만 남게 된다. ‘놀람’ 교향곡에서는 단순하고 한가롭게 주제를 진행시키다가 돌연 팀파니가 벼락 같은 소리를 내도록 만든다. 처음엔 화들짝 놀랐던 청중도 이내 재밌는 장난이 언제 터지나 기다리게 된다.

이렇게 해서 하이든은 ‘파파 하이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작곡가 평균 수명보다 장수(77세)했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기도 하지만, 음악으로 청중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긴장을 풀 줄 아는 재주도 이 기분 좋은 별명에 한몫했다.

탄생 200주년 멘델스존
피아니스트 누나가 작품 써준 게 아닐까

펠릭스 멘델스존(1809~47)의 가계는 화려하다. 할아버지 요제프(1770~1848)는 은행 설립자였다. 그 은행을 아버지 아브라함(1776~1835)이 물려받았다. 유복한 삶은 때로 예술가 경력을 갉아먹는다. 활달하고 눈부신 음표가 쏟아지는 그의 작곡 스타일 또한 ‘철 모르고 배부른 작곡가’라는 얄궂은 인상을 덮어쓰게 했다.

더욱 중요한 가설은 그의 누나와 관련한 것이다. 그의 부모는 펠릭스보다 누나 파니(1805~47)의 음악적 재능을 먼저 인정했다. 함부르크에서 베를린으로 이주한 후 체계적인 음악 레슨을 먼저 받았던 것도 파니였다. 하지만 보수적인 여성관 때문에, 훌륭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파니의 활동은 잊혀졌다. 그래서 멘델스존 작품 대부분이 누나 작곡에 이름만 넣은 것이라는 ‘의혹’도 떠돌았다.

하지만 파니가 남긴 400곡 넘는 작품 중 펠릭스의 이름으로 출판된 것은 가곡 6곡뿐이다. 그리고 이 ‘유령 작곡’은 파니의 동의 아래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펠릭스 멘델스존의 화려하고 섬세한 작품에서 느껴지는 여성성이 이러한 의혹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

모차르트 뺨치는 천재, 그림까지 뛰어나

음악사에서 천재의 대명사는 모차르트지만 멘델스존도 그에 뒤지지 않는 다. 모차르트처럼 어려서부터 대중 음악회에 나서며 개런티를 받아야 하는 가정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실력’이 부각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 그는 12~14세에 현악 합주곡 12곡을 썼다. 현재도 실내악곡 중 최고로 꼽히는 현악 8중주곡 E 플랫 장조를 쓴 것이 불과 16세 때다.

그는 또 ‘멀티미디어’ 천재였다. 좋은 가정환경에서 받은 여러 방면의 교육은 멘델스존의 재능에 불을 붙였다. 모국어인 독일어는 물론 영어·이탈리아어·라틴어 구사에도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가장 놀랄 만한 천재성은 그림에서 나온다.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 멘델스존의 펜화와 수채화 등은 사물을 보는 통찰력과 단아한 표현력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낭만주의 시대를 꽃피운 그의 음악 작품만큼이나 아름답다. 유럽의 대학에서는 멘델스존의 학습 능력과 예술적 천재성에 대한 연구가 쏟아져 나올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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