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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의 ‘멈추지 않는 도전’ 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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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나는 지성이가 축구를 시작한 수원 세류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한국·일본·네덜란드·잉글랜드를 돌며 20여 년간 함께 축구장을 누볐다. 이쯤 되면 아들의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을 알 수 있을 터이지만 요즘도 가끔 지성이에게 놀라곤 한다. 이제는 포기하겠거니 싶을 때에도 지성이는 무서운 의지와 끈기로 이겨내고 일어선다. 아마도 숱한 시련과 밑바닥을 경험하면서 스스로 터득한 경쟁무기가 아닌가 싶다. 중앙일보에 연재하는 ‘박지성의 멈추지 않는 도전’ 첫 편은 아들에게 놀란 세 가지 사건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한다.

 #아버지, 대학 못 가면 치킨집 사장 될래요

지성이가 수원공고 3학년이던 1998년 4월 강릉에서 열린 금강대기 8강전을 잊을 수가 없다. 4강에 올라가야 대학에 지원할 수 있는 특기생 제도 때문에 이날 반드시 이겨야 대학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성이는 이날 승부차기를 실축했다. 동료들의 대학 진학 실패 책임을 혼자 뒤집어써야 할 난감한 입장이었다. 가뜩이나 속상하고 미안한 터에 다른 학부모들은 온갖 험한 이야기로 우리 부자의 속을 긁었다. 특히 지성이를 두고 ‘낙하산’이라고 모욕하는 것은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지성이는 안용중 선배였던 김대의(수원)처럼 정명고를 거쳐 고려대에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용의 꼬리가 되느니 뱀의 머리가 되라’는 이학종 감독의 조언을 받아들여 수원공고에 진학했다. 이 때문에 종종 이 감독에게서 편애를 받는다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나는 다른 학부모들과 한참 싸우다 화를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 그 길로 강릉 터미널로 갔다. 밤새 울면서 술을 마시다 새벽 5시 첫차를 타고 수원으로 왔다. 더 이상 지성이에게 축구를 시킬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팀원들과 함께 수원에 돌아온 지성이는 나보다 의연했다. “축구를 시작했으면 끝까지 해봐야죠”라며 오히려 실의에 빠진 아비를 위로했다. “고3 말까지 축구 해보고, 대학 못 가면 치킨집을 차릴래요”라는 말에 괜스레 아들이 측은해 보였다. 유난히 닭고기를 좋아하던 지성이가 보기에는 오후 늦게야 문을 여는 치킨집 사장이 편해 보였던 모양이다.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 같아 보이면서도 축구에 대해 심지가 굳은 아들의 모습이 대견했다. 지성이는 그해 10월 서울올림픽 개최 10주년을 기념해 제주도에서 열린 제79회 전국체전에서 당당히 팀을 우승시켰다. 지성이의 첫 반전 드라마였다.

#갈 때 가더라도 다 보여주고 떠날래요

2003년 초 PSV 에인트호번에 입단한 이후 6개월간 부상으로 고생했다. 지성이는 수술을 받고 돌아와서도 좀처럼 제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에인트호번 팬들은 지성이에게 야유를 쏟아냈다. 어쩌다 지성이가 경기에 나서면 ‘필요 없다. 아시아로 돌아가라’는 욕설과 비아냥이 경기장에 가득했다. 어느 날 관중석에서 팬들이 마시던 맥주 컵을 던져 지성이 유니폼에 맥주가 줄줄 흘렀다. 이런 꼴을 당하면서도 꾹꾹 참는 아들의 모습을 보니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내 속이 이렇게 타 들어가는데 지성이는 오죽했겠나. 지성이 몰래 일본 쪽에 연락을 취했다. 일본 구단들은 서로 지성이를 원하고 있었다. 힘겨워하던 지성이도 일본행을 반길 줄 알았다. 그러나 지성이는 달랐다. “이런 대접을 받느니 일본으로 복귀하자”고 권유했지만 그때마다 “갈 때 가더라도 후회 없이 다 보여주고 떠날래요. 실패하고 돌아왔다는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아요”라며 단호하게 고개를 돌렸다.

마음이 찡했다. 이후 더 이상 일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지성이는 아버지에게마저도 힘들다는 속내를 내비치질 않았다. 컨디션을 되찾은 지성이가 연일 골을 터뜨리며 화려하게 부활했을 때, 야유를 퍼붓던 에인트호번 팬들은 ‘위∼성 빠르크’로 시작하는 응원가를 지어 부르기 시작했다. 경기장에서 이 노래를 듣고 있자면 ‘이제 됐다’는 안도감과 함께 이제야 알아주는 팬들이 한없이 야속해 몰래 눈물을 훔쳤다.

#맨유 의무진도 독종이라며 혀를 내두른 내 아들

축구선수 아버지로서 재활하는 아들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 다친 부위가 아닌 반대쪽 근육을 강화하려면 고통스러운 동작을 반복해야 한다. 이때마다 참을성 많은 지성이도 비명을 쏟아낸다. “차라리 필드에서 뛰는 게 낫지 재활훈련은 정말 못할 일이다”는 지성이의 말처럼 재활은 지독한 고행이다. 2007년 4월 미국 스테드먼-호킨스 클리닉에서 오른 무릎 연골 수술을 받았을 당시 구단에서는 복귀까지 1년 정도 걸린다고 예상했다. 복귀한다고 해도 이전 기량을 보여줄 수 있을지도 의문일 만큼 큰 수술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 맨유 의무진에서는 전기 재활기기와 함께 꼼꼼한 재활 계획표를 전해줬다. 지성이는 하루도 빠짐없이 계획표대로 재활했다. 눈뜨자마자 점심식사 전까지 반대 근육을 강화했고, 오후에는 일정한 속도로 무릎을 폈다 오므리게 해주는 기기로 재활하며 얼른 오른 무릎 연골이 다시 생겨나기를 바랐다. 잠잘 때만 빼고 재활에 몰두하는 지성이를 보면서 “내 아들이지만 정말 독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맨체스터로 돌아가기 전 다시 미국에 들렀다. 지성이의 무릎수술을 집도했던 스테드먼 박사는 “수술 경과도 좋고 회복 속도가 정말 빠르다”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맨체스터로 돌아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맨유 의무진의 총책임자인 스티브 맥널리 박사는 “이렇게 독한 선수는 처음 봤다. 웬만한 선수들은 재활을 포기하고 선수인생이 끝나기도 하는데 박지성은 놀랍게 회복했다”고 말했다. 지성이는 9개월 만에 필드로 다시 돌아왔다. 공백이 무색할 만큼 안정된 경기력을 보이자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물론 동료들도 축하인사를 건넸다. 지성이가 오른 무릎에만 두 차례 칼을 대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주어진 일이라면 악착같이 해내는 집념 때문일 것이다.

#‘멈추지 않는 도전’은 로마에서도 계속된다

지성이는 지난해 5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열린 모스크바에서 유니폼조차 입지 못하고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필드에서 뛰고 있어야 할 아들이 관람석에서 아비와 같이 경기를 보았다. 경기 내내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더 고통스러울 아들 때문에 한숨조차 맘껏 토해내지 못했다. 지성이가 이날 실망했던 이유는 단지 경기에 뛰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시아인 최초 출전을 기대하던 국내 팬들에게 미안하고 혹시나 자기 인생에 있어 마지막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출전 기회를 놓쳤다는 아쉬움이 더 컸던 모양이다.

또 한번의 바닥을 경험한 지성이는 1년 전 쓰라린 경험을 딛고 로마에서 다시 결승전 출전에 도전한다. 단 1년 만에 다시 결승전 출전 기회를 잡은 것을 보면 지성이에게는 타고난 복이 있긴 있는 것 같다. 휘청휘청 위기를 맞으면서도 지성이의 도전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끝내 승리했다. 지성이의 ‘멈추지 않는 도전’은 로마에서도 이어진다. 내친김에 출전뿐 아니라 멋진 골을 바라는 것은 비단 아비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국민 모두 지성이의 건투를 기원해 주시기를 당부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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