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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삼 칼럼]'체감 민주주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냉정히 말하면 김영삼 (金泳三) 전 대통령은 경제뿐 아니라 그가 자신했던 '민주화' 에서도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지난 5년동안 그의 정권이 이룩한 민주화의 실적은 너무도 미미하고 기대에 미흡한 것이다.

개인적 경험을 놓고 볼때 YS정권에서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들에서처럼 언론인들에게 물리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밖의 것에서는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현재 DJ의 인기도는 80%를 웃돌고 있다.

이는 그가 IMF사태에 기민하게 대처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각하라고 부르지 마라' '내 사진을 굳이 걸 필요가 없다' '전용기를 안 쓰겠다' '과잉경호를 하지 마라' '측근을 기용 않겠다' 등등 국민의 상식에 맞고 가슴에 와 닿는 말과 행동을 잇따라 보여준 데도 크게 힘입었을 것이다.

이는 언필칭 '문민정부' 아래서도 권위주의는 여전했음을 반증해준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언제까지 민주주의를 강조해야 하나' 하는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새 대통령이 시장경제와 함께 다시 한번 민주주의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본다.

당장은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더 시급한 일로 보인다.

그러나 실은 민주주의의 정착이 더 근본적인 국가과제다.

캐들어가면 오늘의 경제위기가 빚어진 근본원인도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던가.

정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약속은 이번 정권으로 끝을 내야 한다.

남들은 각론의 시대에 사는데 우리는 여전히 원론과 총론의 시대에 사는 남부끄러움은 이번이 마지막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국민이 한 술 밥에 배부르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기본적인 인권과 헌법상의 기본권이 보장되고 법이 누구에게도 평등하게 적용되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법에는 엄연히 주거가 일정하고 도주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을 때는 구속할 수 없게 돼 있다.

그러나 누가 봐도 그런 우려가 없는 사람인데도 법집행당국이 밉게 보는 대상이면 그는 영락없이 구속이다.

이럴 때 국민은 절망한다.

비리 정치인이나 공직자들은 웬일인지 구속수감되기만 하면 휠체어나 들것 신세가 돼 입원을 한다.

그러다가는 구속집행정지나 형집행정지로 슬그머니 풀려나 거리를 활보한다.

30년이 넘도록 갇혀 있는 사람도 수두룩한데 말이다.

이럴 때 국민들은 또 다시 절망하게 된다.

"교도관들에게 맞는 50대 수감자를 부축했다가 개처럼 얻어 맞았다.

교도소에서 재소자들을 인간답게 교화만 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길로 들어설 수 있을까." 이는 탈주범 신창언이 남긴 일기의 한 구절이다.

정말 누가 누구를 교도 (矯導)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최근 어느 조사에서는 출소자의 65%가 복역중 구타나 고문을 당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의정부지원 사건으로 이른바 법조 3륜이라는 사법부.검찰.변호사가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다 그렇고 그런 관계에 있음이 드러났다.

관계기관에서는 그런 현상이 극히 예외적이고 부분적인 현상이라고 애써 변명하려 든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런 변명을 들으며 더 절망하고 있다.

정치 지도층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사회 각계의 요인들간에는 전화를 통해 비밀얘기를 하지 않는 것이 상식화돼 있다.

도청 우려 때문이다.

실제로 전화로 한 얘기가 새나가 곤혹스런 경우를 당한 사람이 수없이 많다.

법에 금지된 도청이 횡행해 온 것은 집권자를 비롯한 권력층이 도청을 통한 정보에 맛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력기관에 의한 도청이 사라지려면 대통령의 강한 의지와 단호한 지시가 필요하다.

도청으로 인한 피해를 가장 심하게 겪었을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기에 이런 폐습의 단절에 대한 기대가 크다.

경제위기의 극복만이 아니라 국민들이 시대가 달라지고 발전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피부 민주주의' '체감 민주주의' 의 실현에도 그 못지 않은 노력이 기울여져야 한다.

'내 전화는 절대로 도청되지 않는다' '나는 도주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으니 당연히 구속되지 않는다' 는 것이 사회의 보편적인 믿음이 되고 상식이 되는 사회가 이룩될 때 또 하나의 바퀴인 시장경제도 제대로 굴러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유승삼〈중앙M&B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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