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5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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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천장 한구석 어딘가에 설치되어 있는 듯한 확성기를 통해 고무풍선처럼 부풀려진 여자의 목소리가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줌마. 지금 당장 그 손 놓으세요. 꼭 피를 봐야겠어요? 순리대로 알아듣게 얘기하면, 해결될 문제니깐 그렇게까지 소란 피우지 않아도 됩니다.

그 손부터 놓고 얘기해 보세요. " 훈계조인 목소리의 주인공은 철규가 듣기엔 승희가 분명했다.

곁에서 응원하고 있던 여자가 방으로 들어서는 길로 잽싸게 방문을 안에서 잠가버렸기 때문에 문 밖에서 안달하고 있던 승희는 밖으로 연결된 마이크시스템을 이용한 것이었다.

음향기기를 통한 승희의 기발한 설득은 즉각적이고 단호한 효과를 발휘했다.

화들짝 놀란 여자는 잡고 있던 철규의 바짓가랑이를 놓았고, 그와 함께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차려 자세로 천장의 확성기 쪽으로 돌아서며 시선을 고정했다.

세 사람이 거의 때를 같이해 얼차려 자세를 취하는 순간, 잠시 침묵을 지켰던 승희의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알고 보면, 그 분도 처지가 딱한 분입니다.

살아가기가 고단한 것은 아줌마들이나 마찬가지란 뜻입니다.

그러나 어판장이든 선착장이든 뛰어들어서 난전시세를 어지럽게 만들 못된 생각은 당초부터 없었던 분입니다.

더욱이 남의 이문을 가로채서 자기 배나 불릴 분도 아닙니다.

그러니 소란 피우지 말고 차근차근 얘기해보면, 귀가 먼 분도 아닌데, 못 알아들을 리가 있겠습니까. 꼭 비명소리가 터져나오고 욕설을 주고받는 우격다짐이 나와야 직성들 풀리겠습니까? 개가 꼬리를 흔들어야지 꼬리가 개를 흔드는 불상사가 있어선 안되겠지요? 조용히들 얘기합시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승희가 방안으로 들어와 여자들과 뒤섞여 삿대질을 해가며 행패를 헐뜯기 시작했더라면 해결의 실마리는커녕, 십중팔구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똑같은 말도 마이크라는 여과기능을 통해 진술되고 있을 때는 섣불리 무시할 수 없는 설득력과 퇴치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위력은 좁은 방안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자우룩하게 일어났던 먼지들의 소요도 가위 잠재울 만한 집진력 (集塵力) 까지 기대해볼 만한 것이었다.

음향기기에서 확장되어 들려오는 목소리의 진압력 (鎭壓力)에 은연중 위축되어 왔던 지난 시절의 습관 탓이었다.

따지고 보면 별다른 내용도 없는 확성기의 목소리에 게거품을 입에 문 채 사생결단하고 덤비던 여자는 서리맞은 풀잎처럼 당장 한풀 꺾이고 말았고, 곁에 있는 여자도 시무룩해진 기색이 완연했다.

그제서야 먼지투성이가 된 바지를 추슬러 입을 말미를 얻은 철규는 자신도 모르게 보란 듯이 말했다.

"마이크에서 나오는 연설 들으셨죠? 조용해 얘기하라지 않았소. "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철규가 두 여자를 곰팡이 냄새 나는 간이소파에 앉히고 담판을 벌이는 동안에도 확성기에서만 들려왔던 승희의 모습은 문 밖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칸막이가 된 창 너머로 그녀의 모습이 나타날까 해서 몇 번인가 곁눈질까지 했지만 헛수고였다.

살벌한 얼굴로 만났던 여자들과 웃는 얼굴로 헤어져 영동식당으로 돌아와서야 승희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녀는 시치미를 딱 잡아떼고 손님접대를 하고 있었을 뿐, 노래방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선 아무런 내색도 없었다. 그래서 여자들과 같이 나가서 오래 지체한 까닭을 채근하는 강성민에게도 적당히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말 않고 꿍쳐둔 내막이 있을법한데 속시원하게 털어놓지 않고 머뭇거리는 눈치를 알아챈 강성민도 단념은 하면서도 기분은 씁쓰레한 모양이었다.

"서울이나 바닷가 사람들이나 인심 고약하기는 다를 게 없겠지요. " "그렇진 않아. 시골사람들은 단순해. 최소한 외면하는 척하고 있다가 순식간에 다가와 뒤통수를 치는 야비한 행동은 없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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