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4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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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무엇보다 난감했던 것은, 장세 (場稅) 나 청소비를 들먹인 것이 시비거리를 만들기 위한 허울에 불과했다는 데 있었다.

하필이면, 감정적인 발언에 단련된 여자들을 동원한 것에도 야비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이성적인 설득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뒤에서 사주한 사람들이 있느냐고 꼬집고 들 수도 없었다.

그가 따지고 들면, 바른 대로 대답하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두고 달려온 여자들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명태 할복장 (割腹場)에도 일거리가 떨어진 요즘은 새벽같이 집을 나서서 꽁치 몇 마리 떼어다가 목판에 벌여놓고 하루 종일 사시나무 떨듯 하며 입씨름해 보았자 두부 한 모 사들고 들어가기도 어려운데, 당신네들이 제사상에 개구리 뛰어들듯이 불쑥 끼어들어 사기꾼들이나 할 짓인 세일이다 뭐다 해서 난전시세를 개차반으로 만들면, 우리는 갈매기가 물고 가던 생선창자나 빨자고 떨고 앉았을까? 그게 하나같이 허우대 멀쩡한 사내들이 모여서 꾸며낸 상술이란 게요? 사내자식들 자존심은 개새끼들에게 물려 보냈소?" "아주머니, 말씀이 너무 심합니다.

험악한 말을 입에 담지 않고도 얼마든지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을 텐데요? 욕설은 왜 하십니까?" "배운 게 그것뿐인데 유식한 체했다가 공연한 빈축 살 건 없지 않소, 짠바람 마시며 잔뼈가 굵어온 사람들만 곤두박질하며 살고 있는 선착장에서 유식한 것만 찾고 있는 당신도 무식한 내가 볼 땐 어지간히 미련하고 답답한 사람 같구만. 여보시오. 주문진 포구가 유식한 사람들 말 연습하는 덴 줄 아시오?" "아주머니, 얘기하려는 본질을 벗어나면, 욕설밖에 더 있겠습니까?" "이것 봐. 왜 자꾸 사람의 쓸개를 뒤집어?

여자들이라고 깔보는 거야 뭐야?" "왜 이러십니까. 곤두박질 아니라, 거꾸로 매달려 살아가는 처지들이라 할지라도 사리분별만은 분명히 하고 살아야지, 이러시면 철없는 아이들 생떼 쓰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습니까?" "그래. 우린 거꾸로 매달려 산다.

거꾸로 매달려 사는 여자들 맛 좀 볼래?" "맛을 보다니? 왜들 흥분하십니까? 내가 무얼 맛봐야 한다는 것이오?" 바로 그때였다.

이미 눈동자까지 시뻘게진 여자의 손이 조금도 거리낌을 두지 않고 한철규의 귀쌈을 모양있게 갈기려 들었다.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여자의 손을 낚아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여자의 앙탈이 터져나왔다.

"그래, 이 자식아. 날 쳐 죽여라. 나 죽이고 우리 식솔들 먹여살려만 준다면, 니 소원대로 죽어주마. " "행패를 부리고 있는 건 바로 당신 아니오?" "이 자식아, 여기 증거가 있다.

내 팔을 비튼 게 너냐 나냐?" 여자는 한철규의 허리춤을 요지부동으로 뒤틀어 잡고 엎어지며 나뒹굴기 시작했다.

사태는 순식간에 한철규의 폭행으로 반전되고 말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다급하고 난처한데도 동행한 여자는 팔짱까지 끼고 서서 수수방관이었다.

한철규는 서 있었지만, 서 있는 그를 질질 끌고 다니는 장본인은 바닥에 엎드린 여자였다.

잡고 있는 한철규의 바짓가랑이를 한사코 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철규는 폭력의 욕구를 가다듬고 있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하는 식으로 냉정함을 잃고 여자와 똑같이 대응하고 든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곳을 슬기롭게 빠져나갈 궁리가 없었다.

폐쇄된 좁은 공간 속에서 벌어진 일인데다 동행한 여자까지 강 건너 마을 불구경하듯 간여하려 들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천장이라도 무너지는 돌발사태가 벌어지지 않는 이상, 곤경을 따돌리고 노래방을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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