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글로벌 포커스]아세안의 DJ조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대통령에게 장소감각 (Ortsinn) 이 있고 없고가 정상외교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예를 하나 보자. 웬만하면 바깥나들이를 삼갔으면 좋았을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이 94년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다.

수하르토가 28년째 장기집권하고 그의 친인척들의 국정과 이권 개입이 상상을 초월하는 나라다.

金대통령은 기업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은 깨끗한 정치인이어서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과 측근들도 누구한테서 돈을 받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그 나라 신문들은 金대통령의 말을 크게 보도했다.

그때부터 수하르토와 다른 인도네시아 관리들이 한국의 빈객 (賓客) 을 대하는 태도가 냉랭해지고 金대통령을 위한 행사는 썰렁하기 짝이 없었다.

지난 25일 서울에서 대통령 취임식이 진행되던 시간에 싱가포르 리전트호텔의 한 회의실에서는 한국.아세안포럼의 둘쨋날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6명, 아세안 9개국에서 18명이 참석한 대표들은 한국과 아세안의 협력무드가 지금의 금융위기를 어떻게 이겨내고 앞으로 협력관계를 어떻게 늘려나갈 것인가를 논의했다.

주제발표자로 참석한 싱가포르의 키쇼어 마부바니 외무차관이 한국의 정권교체를 보는 싱가포르, 더 크게는 아세안과 동남아시아의 시각을 대표한다고 할만한 주목할만한 발언을 했다.

마부바니 차관은 한국에서 전직대통령 두 사람이 재판을 받은 사실이 동남아 일부 국가들의 정권교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의견을 말했다.

그는 한국은 동남아에 대해서는 경제발전의 모델과 민주발전의 모델이 되기도 하는데 젊은 세대들에게 한국의 모델이 긍정적인 모델이 될지, 부정적인 모델이 될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아세안측 대표들은 한국과 아세안 사이의 문화적인 거리가 크다는 점, 동남아는 정치적으로 다양한 지역이라는 점, 동남아는 지금 정권교체와 관련해 아주 독특한 전환기를 맞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동남아 사람들은 서양의 정치적 다원주의가 아시아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는 뜻으로 아시아적 가치를 강조한다.

이런 배경에서 싱가포르의 리콴유 (李光耀) 선임총리는 문화는 천명 (天命) 이라는 결정론적인 주장까지 편다.

그들은 무엇을 걱정하는가.

김영삼대통령의 인도네시아 방문때의 실언 (失言) 사건이 이 물음에 대한 확실한 대답이다.

이미 32년을 집권한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는 다음달 일곱번째로 임기 5년의 대통령에 선출된다.

리콴유는 선임총리라는 호칭을 갖고 '상왕 (上王)' 같이 주요정책의 결정에 깊이 참여한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도 후계자를 지명해놓고 있지만 아직 은퇴할 생각은 없다.

필리핀과 태국을 제외하고는 아세안 회원국들 모두가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적인 방식의 정권교체 같은 정치문화가 아직은 생소한 나라들이다.

아세안은 한국에 어떤 지역인가.

96년말 교역 3백24억달러로 네번째 교역상대다.

96년까지의 투자누계는 26억달러로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번째. 건설수주의 96년말 누계는 2백32억달러이고 96년 한해는 40억달러로 총건설수주액의 37%다.

금융기관들이 갖고 있는 채권총액은 1백55억달러. 공식보고되지 않은 액수까지 합치면 2백80억달러로 추산된다.

아세안은 대통령의 색깔과 화려한 민주화투쟁 경력과 도덕성을 파는 시장이 아니라 우리 상품을 팔고 원자재를 사고 돈을 꾸고 빌리고 투자를 하는 수지맞는 시장이어야 한다.

미국도 중국 정책에서 경제적 실리에 발목이 잡혀 인권문제에 대한 입장은 어정쩡할 뿐이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전파하는 것이 미국 외교의 목표라는, 다소 위선적인 윌슨외교의 유산 (遺産) 을 가진 강대국도 아니다.

다행히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에게는 외교에서도 김영삼이라는 탁월한 '반면교사 (反面敎師)' 가 있다.

한국의 정권교체에 다소 불안해 하는 아세안을 상대로 정책의 강조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가 金대통령의 중대한 선택의 하나다.

김영희 〈싱가포르에서 국제문제大記者〉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