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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문화유산 답사기]9.안심사 부도밭…고승들 숨결에 합장이 저절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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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12면

한 절집의 역사와 사세 (寺勢)가 어떠했는가를 알아보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그중 내가 빼놓지 않고 살펴보는 것은 뒷간과 부도밭이다.

거찰 (巨刹) 의 뒷간, 즉 해우소 (解憂所) 는 참으로 거대하다.

지금은 헐렸지만 공주 갑사와 마곡사, 아직도 건재한 해인사 홍제암의 뒷간은 그것 자체가 이 절집의 위세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승 (寺僧) 이 있었기에 해우소가 그리도 컸던 것인가.

또 하나는 부도밭이다.

부도 (浮屠) 란 고승의 사리탑 (舍利塔) 으로 대선사가 열반하면 다비해 수습된 사리를 모신 석조물이다.

9세기 하대신라 (下代新羅)에 8각당 형태로 시작돼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석탑형과 석종형 (石鐘型) 이 생기고 조선시대에는 보주형 (寶珠型) 과 지붕돌을 얹은 부도로 다양하게 바뀌어갔다.

그것도 시대 조류를 남김없이 반영하는 것인데 한 절간의 부도밭에는 그 절을 거쳐간 고승들의 사리탑이 한 자리에 모셔지게 마련이니 얼마나 많은 큰 스님을 배출했는가는 여기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조계산 선암사, 지리산 화엄사, 두륜산 대둔사 같은 큰 절의 부도밭은 아예 절집 입구에 장하게 장식돼 은근히 사세를 과시하는 한 상징물의 몫을 하기도 한다.

묘향산 보현사를 찾았을 때도 나는 뒷간과 부도밭부터 찾아보았다.

뒷간은 이미 전란에 허물어져 다시는 복원되지 못한 모양인데, 돌부도야 어디에고 건재할 것이니 그것이 궁금했다.

절집을 다 둘러보아도 부도밭이 보이지 않아 주지스님께 물었더니 계곡 저 안쪽으로 한참 올라가면 보현사의 할아버지 절인 안심사 (安心寺) 터에 부도밭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튿날 묘향산 만폭동 등반길에는 계곡 초입에서 안심사 부도밭을 들러보게 됐다.

안심사 부도밭은 이제까지 내가 본 우리나라 남북한 통틀어 가장 거대한 부도밭이었다.

북한식 학술용어로 '부도떼' 인데 44기의 부도가 널찍이 펼쳐진 모습은 차라리 '떼부도' 라고 하는 것이 느낌상 맞을 것 같았다.

비슷비슷한 형태의 조형물이 집체적으로 펼쳐질 때 오는 일종의 총체미는 대단히 강렬한 법이다.

개나리꽃은 꽃 한 송이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무더기로 피어날 때 아름다운 것과 같은 원리다.

안심사 부도밭에는 44기의 부도와 19기의 비석이 남아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은 고려말의 대선사였던 지공 (指空) 과 나옹 (懶翁) 의 부도로 1384년에 세워졌고,가장 유명한 것은 1632년에 세워진 서산 (西山) 대사의 부도다.

그리고 나머지는 서산대사 제자의 제자들로 임진왜란 이후 불교중흥에 힘썼던 남파당 (南坡堂).월파당 (月坡堂).허정당 (虛靜堂) 등 일세의 고승들 사리탑이었다.

나는 먼저 서산대사비를 살펴보았다.

6.25동란 때 폭격을 맞아 비는 동강나고 부도는 엎어져 있었다.

그래도 옛 자취를 남김없이 읽을 수 있는데 비문은 놀랍게도 유명한 재상이었던 월사 (月沙) 이정구 (李廷龜)가 지은 것이었다.

준비없이 와서 익히 아는 분의 이름 석자를 보았을 때 생기는 반가움이란 적지않은 기쁨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기쁨은 유식해 얻는 것이 아니라 실은 무식함에도 아는 분이었다는 반가움이었다.

그럴 때는 차라리 무식할수록 기쁨이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유식해 반가운 것은 따로 있다.

옛날 선조 때 유명한 시인인 백호 (白湖) 임제 (林悌)가 이곳에 와 지은 '안심사' 라는 시를 보면 사뭇 다르다.

“안심사 경치 제일이라더니 땅은 넓어 서속 심기 좋고 기암은 아슬아슬 넘어질 듯 한데 깨진 비석은 목은의 글인지라 풀 헤치고 이슥토록 앉아 보네.” 나는 이름 석자 아는게 반가웠고 임백호는 1천자의 비문을 읽는 것이 즐거웠던 것이니 그 차이는 얼마나 큰 것인가.

사실 나야말로 열일 제치고 여기에 오래 머물러 저 비문에 새겨진 글을 더듬으며 이 옛 자취에 서린 역사를 복원해 볼 사람이고,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세상이 나같은 사람에게 부여한 임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여느 관광객.탐승객과 마찬가지로 잠시 사진 찍고 두어개 눈여겨보고 있자니 스스로 생각해도 부끄러울 뿐이다.

그날 하산길에 나는 남보다 부지런히 내려와 다시 이곳 안심사 부도밭에 들렀다.

글은 금석문집 (金石文集)에서 찾아본다 치더라도 글씨의 생김생김을 눈에 익혀둘 마음이었다.

동행한 리정남선생은 나의 뜻을 헤아리고 서둘러 함께 일찍 하산해 더듬거리는 나를 도와주었다.

난 목은의 비문을 만지다가 리선생에게 얘기를 걸었다.

“리선생, 박제가의 '묘향산 기행' 을 읽어보셨습니까?” “읽긴 했지만 오래돼서 기억이 없습네다.”

“이번에 답사 준비차 자세히 보니까 이 비석 글씨가 사기조각처럼 떨어져 나간 것은 겨울철에 탁본한다고 불을 지피고 두들겨 그런거라고 하였더군요.” “아, 그랬던가요.” 우리는 자리를 옮겨 월사가 쓴 서산대사비를 보러갔다.

그러나 날은 어둡고 산그늘은 더욱 심해 비문을 더듬는 것이 점자를 만지는 격이었다.

그러던 중 리선생이 문득 무슨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교수선생, 지금 가진 돈이 좀 있습니까?” “그건 왜요?” “혹시 보현사 기념품 판매소에서 이 비문 탁본을 파는 게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 그래요? 문닫기 전에 얼른 갑시다.”

나는 듯이 달려 판매소에 다다르니 마음씨 좋게 생긴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으며 탁본을 한장 내놓는데 뛰어난 탁 (拓) 은 아니었지만 볼 만했다.

내친 김에 다른 비문 탁본도 있느냐고 물으니 창고에 들어가 한참 만에 하나 가져 오는데 놀랍고 고맙게도 김부식 (金富軾) 이 짓고 문공유 (文公裕)가 쓴 '묘향산 보현사 사지기' (妙香山 普賢寺 寺之記) 였다.

문제는 돈이었다.

북한에 가면 돈 쓸 일이 별로 없을 줄 알고 베이징에 머무를 때 쓰다 남은 달러 몇 닢밖에 없었다.

그래도 갖고 싶은 욕망에 흥정을 시작했다.

“판매원 동무, 이거 맘에 듭니다마는 값을 좀 낮춰주십시오.” “안 됩니다.

워낙에 값이 눅어서 내려줄 수 없습니다.”

“그래도 가진 게 없으니 어떡합니까?” “야! 이거,가격투쟁하자 이겁니까?” 그들 말로 흥정을 투쟁이라고 했는데 나야말로 흥정이 아니라 투쟁을 해서 거저 얻다시피 했다.

판매원이 마지못해 포장해 주는 걸 보고 있자니 미안한 마음이 일어났다.

나는 조사단 살림을 맡고 있는 유영구 팀장을 염두에 두고 한마디 여운을 남겨두었다.

“판매원 동무, 고맙습니다.

내일 우리 '생활책임자 동무' 하고 와서 꿀이랑 염주랑 많이 팔아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판매원 아주머니는 웃음지으면서 괜찮다는 대답을 보내왔다.

“일 없습니다.”

글 = 유홍준 〈영남대 교수·박물관장〉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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