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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후 더 사랑받는 프랑스 전 대통령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유럽의회 선거를 한 달 앞두고 유럽 전역에 서서히 선거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최근 프랑스에서 뜻밖의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유럽연합(EU) 차기 집행위원장 지지도 조사에서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전 프랑스 대통령이 2위에 오른 것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 이어 18%의 지지를 받았다. 거의 30년 전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노정객이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나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등 쟁쟁한 현역을 모두 제쳤으니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결과가 가능했던 건 데스탱 전 대통령이 감놔라 배놔라 정치판에 개입해서가 아니다. 국가 원로로서 충심어린 조력자 역할을 한 덕분이다. 특히 외교 문제에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지난달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 직전 사르코지 대통령이 그를 만난 것도 국제 정세를 읽는 능력이 탁월한 그의 고견을 듣기위해서였다. 드러내지 않으면서 조용히 현 정부에 도움을 건네는 그에게 많은 국민들은 여전히 신뢰를 보내고 있다.

2년 전 퇴임한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도 비슷한 경우다. 그는 2007년 퇴임 당시 지지도는 40%를 간신히 넘었지만 그게 50년 정치 인생 최종 성적표는 아니었다. 지난달말 조사에서 현역 좌·우파 정치인을 모두 제치고 지지도 1위를 기록한 것이다. 퇴임 당시의 두 배에 가까운 74%였다.

시라크의 ‘늦인기’ 비결은 그가 ‘퇴임 대통령’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기 때문이다. 우선 그는 현실 정치에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특히 오랫동안 불편한 관계였던 사르코지에 대해 말을 아꼈다. 정치활동 대신 사회 운동을 한다. 아프리카 어린이 돕기와 불량 약품 추방 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 프랑스 언론은 “정치에서 깨끗이 물러나 아름다운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에서 많은 프랑스인들이 시라크 노스탤지아(향수)를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전직 대통령 가족이 검은 돈을 받았느냐를 두고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우리의 처지로서는 너무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린다. 꼭 뇌물이 아니더라도 퇴임 후까지 정치판에 영향력을 행사하기위해 지역 감정을 부추기거나 험담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전직 대통령들이다. 퇴임 후에도 여전히 신뢰와 지지를 얻고 있는 프랑스의 두 전직 대통령이 부럽기만 하다.

전진배 파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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