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시대' 자사제품 안사면 찜찜…차·가구등 울며 구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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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대기업그룹사 차장 A (39) 씨는 최근 울며 겨자먹기로 계열사에서 생산한 신차를 사기 위해 구입신청서를 냈다.

승용차를 구입한지 2년도 채 안됐지만 며칠전 부서장으로부터 “계열사의 차량 판매실적이 부진하니 전계열사의 대리급 이상 간부사원 1만5천여명은 지난해 출고된 승용차를 1대씩 구입하라” 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국제통화기금 (IMF) 한파로 봉급까지 줄어든 판에 난데없이 차까지 사야 할 처지가 된 A씨는 “차를 구입하지 않을 경우 연말 인사에서 우선정리 대상으로 삼는다는 소문이 돌아 결국 구입신청서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고 털어놓았다.

다른 자동차회사는 최근 부품 납품업체들에 신차 구입을 요구하고 있는 경우. 아버지가 이 회사 하청업체에 다닌다는 한 여고생은 PC통신을 통해 원치않는 승용차를 구입해야 하는 아버지의 고민을 전했다.

“아버지가 자동차를 팔지 못해 며칠째 잠도 제대로 못 이룬답니다.

제발 누가 차 좀 사주세요. ”

IMF한파에 따른 판매실적 부진으로 경영난에 처한 일부 기업들이 계열사나 납품업체 직원들에게 자사제품 구입을 강요해 반발을 사고 있다.

회사측은 할인혜택을 주는 캠페인성 행사일 뿐 강매는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직장인들은 임금이 깎인데 이어 물품판매까지 떠맡아야 하는 이중고 (二重苦)에 시달리고 있다.

한 부엌가구 제조업체는 지난해말 채용한 30여명의 수습사원들에게 이달말까지 자사에서 생산한 부엌가구를 1인당 3천만원어치씩 팔도록 요구하고 있다.

수습사원 B씨는 “요즘 같은 때 7백만원이 넘는 부엌가구 세트를 장만할 사람이 어디 있느냐. 결국 가족과 친척에게 팔라는 것” 이라고 전했다.

이밖에도 최근 K기업은 자사 물품의 상품권, H기업은 30만원대의 가정용전화기 1대씩, E사는 시계 50개씩을 상여금 대신 지급했다 물의를 빚기도 했다.

소비자보호원에도 최근 '직원채용 조건으로 물품판매를 요구한 뒤 할당 금액을 채우지 못하자 일방적으로 채용을 취소했다' 며 해당회사를 고발한 사례가 10여건이나 된다.

이상언·장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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