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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피의사실 보도 최소화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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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인권우호적인 수사관행 확립을 위해 법무부와 대검찰청이 최근 기울여 온 노력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제도개선 못지않게 수사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이 범죄 혐의자들을 사회의 적으로 보지 말고, 실족한 이웃으로 보는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필요성은 어느 때보다 높다. 최근 들어 사회적 지명도가 높은 피의자들이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던 중 자살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나친 수사 의욕, 피의자를 고립무원의 상태로 몰아가는 강압적인 분위기 등이 원인의 일단이 아닌지 짚어봐야 할 시기다.

넓은 틀에서 보면 피의사실 공표도 피의자의 명예.인권과 관련된 사항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문제는 국민의 알 권리 및 언론보도의 자유와 충돌하는 주제다.

옛날의 유지.포르말린 파동이나 최근 불량만두 파동을 보면 국민의 알권리 차원에서 신속한 보도의 필요성이 인정되는 반면, 경찰.식의약청의 성급한 피의사실 공표가 일파만파로 번져 정직한 기업들까지 무차별 타격을 받는 사태를 가져왔다. 수사 과정에서 국민의 알권리 충족을 위한 언론보도의 자유는 존중돼야 하지만 피의자 및 그 가족들의 프라이버시와 명예 손상 문제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며칠 전에도 안풍사건 항소심에서 강삼재 .김기섭씨에게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감추어진 진실을 묻어둔 채 이들은 수사 과정에서부터 마치 국고를 축낸 공공의 적인 양 언론에 노출됐다. 아직 최종심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들은 그동안 범죄자로 세인의 뇌리에 낙인 찍히고 말았다. 오죽했으면 열번도 넘게 한강에 뛰어들 생각을 했다고 할까. 사회적 지명도가 높은 사람일수록 검찰청사 출입문 앞 포토라인을 통과하기가 죽을 맛이라고 하소연한다.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신봉하는 성숙한 민주 시민사회라면 언론에 의한 이 같은 피의자 사냥을 두고만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대검도 4월부터 수사사건 공보에 관한 업무처리 지침을 시행하면서 피의자의 명예와 인권을 위해 피의사실 공표를 최소화하려 애쓰고 있다.

아무리 사회적 강자로 군림해 왔더라도 일단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는 처지가 되면 사회적 약자의 자리로 내려앉는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유능한 변호인을 줄줄이 대동한다 하더라도 그 위치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기지는 않는다.

보도의 자유를 강조하는 이들은 언론보도로 적극적 일반예방 효과가 기대되고, 수사의 밀행주의를 통제해 국가의 형벌권 남용을 억지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물론 국민적 관심사인 범죄사실을 국가가 인권 이익을 내세워 앞장서 은폐하는 듯한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적정한 한계가 어디인가다.

먼저 수사기관의 홍보 창구를 통해 절제된 범위 안에서 보도자료를 배포하는 관행을 정착시켜야 한다. 취재의 자유가 피의자의 의사에 반해 직접 피의자에게 질문공세를 퍼붓는 단계까지 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현행 포토라인은 폐지해야 한다. 대신 피의자의 신변이 직접 노출되지 않는 일정거리를 두고 사진촬영을 하게 하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재판을 받고 있는 형사 피고인에 대해서는 법정의 권위를 위해서도 직접 촬영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다음 단계로 범죄사실과 범인에 관한 언론보도의 축은 현재의 검찰 수사에서 법원의 확정판결 뒤로 중심이 이동돼야 한다. 무죄 추정을 받는 피의자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수사의 밀행으로 야기될 인권침해는 무차별적인 언론보도가 아니라 인권위나 헌법재판소 같은 법적 제도를 통해 구제되도록 하는 게 정도다.

물론 보도관행도 관행인 만큼 당장 쉽게 고쳐지기 힘든 관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법원.검찰.헌재.변협, 그리고 법조 출입기자단이 보도자유와 피의자 인권 사이의 갈등을 풀기 위한 대화 마당을 조속히 정례화하길 바란다.

김일수 고려대 교수.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