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용택의 봄나물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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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앞산 산밭에 쌓였던 눈들이 게눈 감추듯 녹아 산과 들에 봄인가 싶으면 땅이 얼었다 녹았다 하며 산천에 봄기운이 돈다.

눈 녹은 닥나무 밑이나 뽕나무 밑은 물기 촉촉해지고 그 나무뿌리 썩은 곳에는 버섯이 솟아난다.

이 버섯들을 쌀뜨물에 무를 썰어 함께 뿌려넣고 국을 끓여 거친 고춧가루를 처먹으면 얼큰한게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뽕나무 버섯이나 닥나무 버섯 철이 가면 냉이를 캔다.

냉이는 봄기운이 돌면 금방 푸른색을 나타내는데, 냉이는 사람들이 그 해에 처음 먹는 나물이다.

냉이를 캘 때 달래도 캔다.

달래는 줄기가 가늘 해서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데 여러 개가 한군데 오불오불 나 있다.

달래를 캐다가 달래장을 만들어 밥을 비벼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뭐니뭐니해도 달래장은 참기름 치고 돌나물과 함께 비벼 먹어야 제 달래 맛이 난다.

달래와 냉이가 나오고 강가에 쑥이 나면 산이나 들이나 논밭 두렁엔 온갖 나물들이 다 돋아난다.

아니 그 때쯤 돋아난 풀들은 모두 나물이고 양식이 되었다.

텃밭에 광대살이.콩박나물.좁쌀뱅이.머슴둘래.걸럭지나물, 논두렁에 지충개, 논바닥에 자운영.불미나리, 강변에 싸리나물, 밭가에 원추리, 산에 취나물.고사리.제비나물. 딱주.삽주뿌리 할 것 없이 풀이란 풀은 모두 나물이었다.

장과 소금만 있으면 모두 무친 나물 반찬이 되고 된장만 있으면 모두 국이 되었다.

우리 동네는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남쪽에 있는 산에 눈이 한번 오면 춘삼월이 되어야 눈이 녹는다.

그 산엔 자갈들이 참 많다.

그 자갈밭에 눈이 녹기가 바쁘게 나물이 나는데 그 나물 이름이 밀래초이다.

밀래초는 익모초와 더불어 풀 중에서 가장 쓴 나물인데 어찌나 쓴지 어린 우리들은 입도 못 댄다.

소태나무가 쓰다고들 하지만 소태나무는 저리 가라다.

봄이 되면 이 쓴 나물을 캐다가 살짝 데쳐서 별 양념도 넣지 않고 무쳐 먹곤 했다.

이 밀래초는 텃밭 언덕에 나는 머위와 함께 사람들의 봄입맛을 돋구는데 아주 좋은 약이요 반찬이요 양식이었다.

지금도 내가 좋아하는 나물은 불미나리다.

다른 미나리들은 도랑 가에 많이 나는데 이 불미나리는 도랑 가에 나지 않고 물기가 적은 산중 논에 많이 난다.

불미나리는 포기가 다른 미나리하고 틀려 납딱납딱하게 퍼져있고 줄기는 자라지 않는다. 아버지가 간이 나쁘셨을 때에 어머니는 8년동안이나 미나리를 캐다가 즙을 내어드렸다고 하셨다.

내가 몸이 좋지 않을 때도 어머니는 봄날 산골짜기를 찾아다니시며 이 불미나리를 한 소쿠리씩 캐다가 즙을 내어 먹게 하셨다.

불미나리 즙은 약이고 무쳐 먹으면 반찬이다.

어머니는 늘 밥을 비벼 드실 때 거섶 (상치.김치.고사리.취나물.토란잎등 나물들을 어머니는 거섶이라고 불렀다) 을 늘 밥보다 많이 넣어 비벼 드셨다.

"밥을 비빌 때는 뭐니 뭐니 혀도 거섶이 많이 들아가야 맛이 나는 것이다" 하시며 어쩔 때 보면 밥 티는 드문드문 했고 보이는 건 온갖 풀 (?

) 뿐일 때가 많았다.

산마다 파릇파릇 새 풀잎이 돋아나면 제일 먼저 솟아나는 게 고사리였다.

고사리는 제사상에 토란잎과 함께 꼭 올라야 하는 나물이었다.

고사리는 초봄부터 진달래꽃이 다 지고 찔레 순이 먹기 좋게 돋을 때까지 있었다.

고사리를 꺾다가 목이 마르면 진달래꽃을 따먹었고 배가 고프면 찔레나무 밑에 솟은 새 찔레 순을 꺾어 먹었다.

고사리를 꺾으며 삽주나 딱주 뿌리를 보는 족족 캐기도 하는데 삽주 뿌리는 남자들에게 좋고, 딱주는 닭을 넣어 고아 먹으면 산후 조리에 좋다고 했다.

이 나라 강산에 새봄이 왔다.

봄빛 아래 서서 땅을 내려다보니 돋아나는 온갖 풀들로 내 몸이 꿈틀꿈틀 근질근질하다.

새 생명들의 힘찬 기가 내 몸에까지 전해지는가 보다.

저 빛 좋은 봄날에 나물 캐는 처녀들은 다 어디 갔간디 강가에는 봄빛만 저리 해살 짓는고. "지충개야 지충개야/나주사탕 지충개야/매화 같은 울 어머니/떡잎 같은 나를 두고/뗏장이불 둘렀던가.

" 배고픈 봄날 어머니 나물 캐며 불렀던 서러운 나물 노래였다.

아, 풀, 싱싱한 풀잎이 그리운 이 봄날의 허기여. (여기 나온 나물 이름은 모두 우리 어머니가 부르는 이름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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