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 시(詩)가 있는 아침 ] - '장대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조용미(1962~ ) '장대비' 전문

오래된 쇠못의 붉은 옷이 얼룩진다
시든 꽃대의 목덜미에 생채기를 내며
긴 손톱이 지나가는 자국
아픈 몸마다 팅팅 내리꽂히는
녹슨 쇠못들
떨어지는 소리

하얀 마당에 푹 푹 단내를 내며
쏟아지는 녹물들
붉은 빗금을 그으며 머리 위로 떨어지는
닭벼슬! 맨드라미! 백일홍! 해당화! 엉겅퀴! 큰바늘꽃붉은잎!
신음소리를 내며 막 벌어지는
상처의 입들,
눈동자를 붉게 물들이며
나쁜 피를 다 쏟아내는 저녁



누가 빗소리를 녹슨 쇠못들 떨어지는 소리라 말하는가. 아픈 영혼에게는 빗방울도 내리꽂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법. 흰색이나 분홍의 화사한 봄꽃과 달리 녹물을 받아먹고 자라 시뻘건 빛을 토하는 여름꽃들을 보라. 한바탕 빗물이 휩쓸고 간 마을마다 상처처럼 남아 있는 저 붉은 얼룩을 보라. 장대비 그친 뒤 철로변에 피어 있는 맨드라미 더욱 붉다.

나희덕<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