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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조령조개(朝令朝改)와 과거 타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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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본은 요즘 10여년의 장기 침체에서 벗어난 경제회복 이야기로 활기가 넘친다. "복합 호황"이란 말이 나오고 "품질.성능.신뢰의 승리" "세계가 주목하는 일본의 정신" 등 자화자찬이 가득하다. 교수들은 각 기업의 성공사례 분석으로 바쁘고 연구소들은 향후 전략 짜기로 떠들썩하다. 중국의 특수가 2008년 베이징(北京)올림픽 때까지 이어질 것인지, 내후년 월드컵 때 세계시장에서의 PDP 수요가 얼마나 될지 토론이 한창이다. 인도와 러시아로의 진출 방안도 주요 관심사다. 사회 전체가 고민하고 토론하는 화두가 우리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물론 일본도 총선으로 시끄럽고 연금개혁 갈등 등 어두운 주제 또한 수두룩하다. 그렇지만 전반적 화두는 어제가 아닌 내일이요, '너의 허물'이 아닌 '우리의 저력'에 모이고 있다.

잘나가는 집안엔 으레 덕담이 넘치고, 안 되는 집안엔 분란이 있게 마련이라던가. 그네들의 활기있는 대화를 엿듣다보면 부럽고, 우리 집안의 그치지 않는 불협화음 때문에 짜증이 난다.

지난 1년간 우리 집안의 소리라곤 과거타령.개혁타령, 그리고 "네 탓"타령이 전부다. 불법 대선자금을 털어내자며 벌인 한바탕 푸닥거리에선 너저분한 소리만 들려왔다. 그 수준도 유치원생 급이다. "나만 먹었느냐." "너보다는 덜 먹었다." "요만큼만 줬느냐?" "쟤한테도 줬지?"

대통령 탄핵사태 때의 국론분열은 돌아보기도 싫다. 대통령이 업무에 복귀하면 미래 비전이 제시되고 국민통합의 비책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야말로 야무진 희망에 불과했다. 대통령이 오히려 편 가르기에 앞장서고 대결적 태도를 거두지 않으면서 화합의 화두는 날아갔다. 진보와 보수를 갈라놓고 보수를 면박한 대통령의 연세대 강연은 사회적 분란만 키웠다.

최근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을 접하면 짜증을 넘어 울화가 치민다. 간첩과 빨치산 출신이 민주인사라니. 도대체 여기가 어느 나라야. 그들에게 가한 고문과 비인간적 대우가 잘못된 것이고, 그러한 고난에도 굽히지 않은 개인적 신념을 평가할 만하다고 치자.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민주화가 아닌, 북한의 대남적화통일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다. 당장 엄청난 반발을 부를 게 뻔한 문제를 이 시점에 들고나오는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갈등을 부추기지 못해 안달이 난 것일까.

사법적 결론이 오래 전에 끝난 KAL기 사건을 여당 원내대표가 재조사하자고 나서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우리 사회의 화두를 언제까지 과거문제에 맴돌게 하고 갈등.대결로 얼룩지게 하려는지 답답하다.

개혁도 필요하고,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바로잡기도 중요하다. 바른 사회의 기초를 다지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거기에만 매달릴 만큼 상황이 한가하지 않다. 날이 훤히 밝아 남들은 모두 일터로 나가는데 집안에 모여 뒤늦게 연장을 고치고 어제 일로 다투기만 하는 꼴이다. 이제 사회적 화두가 바뀌어야 한다. 먹고 사는 문제가 급하지 않은가.

월간 '넥스트' 7월호에 실린 가라쓰 하지메 도카이대 교수의 글을 읽자니 식은땀이 흐른다. "조령모개(朝令暮改, 아침에 만든 법령을 저녁에 바꾼다)는 나쁜 의미로 쓰여 왔으나, 지금은 그것도 늦다. 일본 사회에서는 조령조개(朝令朝改, 아침에 명령을 내려 아침에 바로 개정한다)다. 과거의 교훈은 지금은 통용되지 않는다. 나날이 새로운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변화의 시대에 후퇴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먼저 나아가야 한다."

잘나가는 집인데도 "조령조개"를 외치며 채찍질을 한다. 저들의 달음박질을 구경만 할 것인가.

허남진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