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보고 세로읽기]고통의 삶 다시 꾸려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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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TV에서는 무슨 프로그램 동맹을 맺었는지 이 채널 저 채널 할 것 없이 연일 복고풍이 강세다.

'옥이이모' '아들과 딸' 같은 재탕 드라마가 그렇고 신작 드라마인 '육남매' 도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코미디 등 여타 프로그램도 모두 복고풍의 정조가 왕성하다.

내남없이 궁핍하던 '그 때 그 시절' 의 풍정을 21세기를 목전에 둔 작금에 복각하고 있는 터이다.

하긴 우리에게 이제 21세기라는 언사는 일견 사치에 가까운 것일는지 모른다.

불과 6개월 사이에 21세기의 새로운 광개토제국을 꿈꾸던 원기는 홀연히 사그라들고 과거로의 타임캡슐을 타야할 처지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아무려나 예의 프로그램들은 모두 못먹고 헐벗었던 때를 상기시키며 가난했던 시절의 앙다짐, 다시말해 오로지 배불리 먹고 남에게 행세깨나 해보기 위해 마지막 근력까지 짜내던 우리의 이력을 오늘에 되살리자는 전언을 보내고 있다.

생각하니 그런 때도 있었다.

복고취미.향수산업이 한창 잘 나가던 때 말이다.

없던 자 배불러지면 우선 족보부터 만들듯이, 사람들은 아랫배에 기름기가 채워지자 서서히 과거를 불러들였다.

하지만 그런 과거의 호출이 지난 시절의 고난을 잊지말자는 성찰적 회고 같은 것은 물론 아니었다.

보리밥 같은 그 과거의 양식을 다시 먹음으로써, 혹은 60년대의 '대한 늬우스' 를 다시 봄으로써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현재의 안온함이었다.

이를테면 그것은 현재의 부를 더욱 찬란하게 비춰주는 조명장치와 유사한 것이었다.

복고.향수 등의 이미지로 잔뜩 장식한 각종 문화상품의 강력한 상종가 추세는 그런 정황의 적절한 산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은 철저히 과거의 '이미지' 만을 먹는 것이었다.

이미지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지는 단지 이미지이기에 무서울 것 없었다.

말하자면 현실의 안돈 (安頓) 이 보장되는 한에서 이루어지는 안전한 과거로의 시간여행이었다.

하지만 그 이미지의 장복을 통해 선진국 클럽 가입이나 GDP 세계 11위국임을 더욱 즐기고 있는 동안 현실은 고장나 있었다.

복고 이미지에의 쏠림은 현실의 고장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도 했다.

비약하자면 이미지는 현실을 혹은 현실에 대한 적절한 판단을 잡아먹고 있는 중이었다. 백일몽?

이제 우리는 이미지가 아니라 실제 현실로서 그 과거의 삶을 다시 꾸려야 한다.

복고 이미지를 즐기던 사람들은 그 이미지 속에 복원되던 풍경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라면.설탕 사재기는 급수차 물을 먼저 받으려 새벽부터 나와있어야 했던 사정과 별반 다르지 않으며 자동차 되팔기는 옷가지 들고 전당포 찾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만약에 5년, 10년 뒤 다시 우리 배에 기름기가 돌고 보신관광의 여력이 생긴다면 그때도 '우리의 IMF시절은 이랬지' 하는 복고 이미지를 즐기고 있을까?

그러다 다시 '구제금융클럽' 에 재가입하게 되면?

이성욱〈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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