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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 인터뷰]일본 최대노조단체 '連合' 와시오 에쓰야 회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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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노사정 (勞使政) 위원회가 대타협을 이뤄냈지만 본격적인 어려움은 이제부터다.

국제사회가 숨가쁘게 돌아가는 한국 노동계를 숨죽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국내적으로는 대타협 이전부터 이미 감원.해고가 남의 일이 아닌 상황에 들어갔다.

연공서열.종신고용 신화가 이미 무너지고 능력평가에 따른 연봉제 도입 확대와 구조조정에서 빚어진 정리해고 등으로 일본 노동계도 머리를 싸매고 있다.

일본내 1천2백50여만명의 노동조합원중 61.5%가 가입해 있는 최대 노조단체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 (連合.렌고) 의 와시오 에쓰야 (鷲尾悅也.60) 회장을 본지 최철주 (崔喆周) 일본총국장이 도쿄 총평 (總評) 회관내 렌고회장실에서 만났다.

도쿄 (東京) 대 경제학부 출신의 와시오 회장은 야하타제철 (현 신일본제철) 입사후 30여년간 노동운동에 투신, 철강노련위원장.렌고사무국장을 거쳐 지난해 10월 현직에 취임했다.

- 한국의 노사정위원회가 진통끝에 정리해고제 도입에 합의했는데 이를 어떻게 보십니까.

“원만하게 타협에 이른 점을 정말 높이 평가합니다.

특히 저는 기꺼이 고통을 감수키로 한 한국 노동계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요. 일본의 수준에 못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 잘 알다시피 한국은 기업도산.실업자 증가로 매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일본 경제도 심각하다지만 한국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만.

“일본이라고 마냥 장담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다행인 것은 한국보다 먼저 발전을 이뤄 이른 바 '테이크 오프 (take off)' 를 한 상태라 상대적으로 여력이 있다고 봅니다.

한국은 막 축적기에 들어가려던 단계에서 위기를 맞았기 때문에 진통이 보통 아닐 것으로 생각돼요. ”

- 향후 한국의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정리해고의 파장인데요.

“일본은 아직 법으로 정리해고를 인정해야 하는 상황을 맞은 적이 없습니다.

경쟁력이 없는 부문은 서서히, 그리고 유연하게 정리해 왔습니다.

어느 한 분야가 산업구조 고도화에 따라 경쟁력을 잃게 되면 해당노동자를 직업훈련을 거쳐 첨단분야로 이동시키는 방식이었지요. 실업자나 실업기간을 최소화하면서 말입니다.

일본의 사례라고 해서 다 한국에 참고가 되는 건 아니겠지만 두가지 경험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는 종전 직후 10여년간 시행된 '일일고용' (한국의 취로사업) 입니다.

정부재정으로 실업자나 고령자를 도로공사같은 데 투입했어요. 민간이 흡수하지 못하는 실업자를 정부가 떠맡고 나선거지요. 또 하나는 석탄산업이 석유산업으로 대체될 때의 경험입니다.

이 때도 정부가 앞장서 싼 주택을 제공하고 철저한 기능훈련을 시켜 탄광노동자의 전직을 도왔습니다.”

- 그렇지만 한국은 실업보험의 재원조차 턱없이 부족한 형편입니다.

“종전 직후의 일본도 경상수지나 재정면에서 여유가 없었습니다.

저는 어떤 형태로든 정부가 나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 가정이지만 만약 일본의 샐러리맨이 한국의 노동자와 같은 곤경에 처해 있다면 렌고는 어떤 주장을 펼치겠습니까.

“실업대책 차원에서 공공사업을 벌이라고 정부에 요구하겠습니다.

쓸모없는 사업을 벌이라는 게 아니라 도로 보수처럼 원래 재정으로 해야 할 일에 실업자를 동원하라고 말입니다.

그냥 실업수당을 주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IMF도 이런 사업은 용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프랑스 등 유럽 몇몇 국가의 경우를 어떻게 보십니까. 정리해고제는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실업자가 급증해 고민중인데요.

“유럽은 일단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입니다만 지금같은 상황에선 실업자가 늘 수밖에 없습니다.

산업구조가 변할수록 노동시장 유동화는 피할 수 없어요. 노조도 대안을 내야지 반대일색이어서는 시대에 뒤지고 맙니다.

역시 노사정이 한자리에 모여 달라진 시대상황에 대해 인식을 같이하고 정 (政) 과 사 (使)가 '한동안 고통스럽겠지만 이해해 달라' 고 노 (勞) 를 설득해야지요.”

- 렌고 건물에 들어오다 보니 입구에 '일하는 사람을 위한 21세기의 노동기준을 만들자' 는 플래카드가 나붙어 있던데요. 일본도 생각보다 앞서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아무래도 산업구조가 좀더 고도화된 만큼 노동력의 이동도 한발 앞서서 진행되고 있지요. 거기에 적극 대비하자는 뜻입니다.

상대적인 진보에 안주한 채 21세기를 맞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플래카드에 담았습니다.”

- 렌고는 전반적인 노동시장 유동화 경향에 어떻게 대응할 생각입니까.

“산업구조 고도화에 따른 유동화 흐름은 어차피 피할 도리가 없어요. 노동자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 생기는 타임 래그 (time lag=시간지체) 를 어떻게 줄이느냐가 문제지요. 노동의 소프트랜딩 (연착륙) 이 중요합니다.”

- 일본도 지금 행정개혁.규제완화 바람이 한창인데 렌고 내부에서도 업종에 따라 찬반이 엇갈린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관공서노조는 공무원 감축을 반대하고 민간부문 노조는 찬성쪽이지요. 그러나 민간노조쪽에서 경쟁력 논리를 들어 꾸준히 설득한 결과 어느 정도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습니다.”

- 한국은 올해 실업자가 2백만명에 달한다는 예측이 나올 정도로 답답한 상황입니다.

미국류의 시장메커니즘 논리가 '글로벌 룰' 로 자리잡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일본 노동계의 시각은 어떻습니까.

“IMF가 글로벌스탠더드 (국제기준) 를 내세워 약육강식 위주의 정책을 요구하는데 대해서는 국제 노동운동계에서도 반론이 많습니다.

저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노동자의 업종전환을 위한 인재투자 같은 일에는 IMF도 반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업자를 늘리면 내수가 줄어서 결과적으로 국가전체의 안정을 흔듭니다.

어떻게든 돈이 돌도록 만든다는 발상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 일경련 (日經連.한국의 경총)에서는 최근 6년연속 '임금인상률 제로 (0)' 방침을 정했습니다.

올해 춘투 (春鬪.일본의 봄철 임금인상교섭) 전망은 어떻습니까. 와시오회장이 몸담았던 철강노련 같은 곳은 올해부터 격년제 임금교섭을 실시하기로 했는데 잘 되겠습니까.

“여력이 있는 업종은 임금을 올리라는 게 우리 입장입니다.

과거처럼 일렬횡대로 다 올려달라는 건 아니예요. 사정이 어려운 생명보험 노조는 자진해서 올해 인상을 요구하지 않기로 했고 은행업계는 아예 향후 3년간 '0%' 로 묶기로 했어요. 그러나 인상소지가 있는 곳은 올려야 합니다.

일경련 주장처럼 되지는 않을 겁니다.

철강노련은 내 친정이기는 하지만 2년마다 한번씩 교섭한다는 새 제도가 과연 잘 시행될지 의문입니다.

사용자측도 고민중이라고 들었어요.”

- 일본의 노조조직률은 해마다 낮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8백만 노조원을 자랑하는 렌고도 같은 형편이고요. 왜 그렇습니까.

“대기업노조 중심으로 움직이던 옛날하고 달라서 노조로 묶기 어려운 노동자가 많아진 게 가장 큰 원인입니다.”

- 한국에서도 이제 노조의 정치활동이 가능하게 됐습니다.

노동운동과 정치의 관계를 어떻게 보십니까.

“개인적인 인상입니다만 한국의 노동운동은 어느 순간 발칵하고 일을 벌이는 기질이 있는 것 같아요. 박인상 (朴仁相) 노총위원장과는 개인적으로 안면이 있는 사이인데 만나면 나는 '제발 좀 진정하시라' 고 조언합니다.

그런데 그 양반 말이 '차분해지려고 해도 주위에서 들고일어나면 그렇게 안된다' 고 해요. (웃음) 물론 일본도 과거에는 폭력이 난무하던 시절이 있었지만요. 노조가 정치활동에 나설 경우 극단으로 흐르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할 겁니다.

정치활동은 타협이 기본입니다.

타협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바람잘 날이 없어요. 파업 자체야 물론 멋져 보이는 일이지요. 시작하기도 쉽고. 나는 朴위원장에게 '총파업은 상대가 양보할 전망이 뚜렷할 때 하라. 시작하기는 쉽지만 그만두기는 정말 어렵다' 고 말한 적도 있어요.”

- 최근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질문입니다만 명문 도쿄대 출신으로 원했다면 정치인도 될 수 있었을 텐데 왜 노동운동에 들어섰습니까.

“한국에는 10년전 한 차례 방문하고는 못가봤습니다.

많이 달라졌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웃으며) 정치요? 원래 나는 정치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선거때 표달라고 머리 숙이거나 사사건건 감시받는 일도 체질적으로 맞지 않고요.”

만난 사람=최철주 일본총국장·정리 = 노재현 특파원

〈와시오 에쓰야회장 약력〉

▶38년 도쿄 (東京) 도 출생. 도쿄대 경제학부졸

▶63년 야하타 (八幡) 제철 (현 신일본제철) 입사

▶74년 신일본제철 본사노조 위원장

▶88년 일본철강노조연합회 위원장

▶90년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 (렌고) 부회장

▶93년 렌고 사무국장

▶97년 렌고 회장

▶현재 철강노조연합회 대표.노동자복지중앙협회장 및 국회이전심의회.재정제도심의회.세제조사회 위원 등 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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