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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 난장 29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다시 눈을 뜬 것은 투명한 아침 햇살이 문창살 가득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늦은 아침이었다.

옆자리를 돌아보았으나 승희는 안개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방안을 살펴 보았다.

그러나 자신과 한 여자가 밤새 잠자리를 같이했다는 단서가 될 모든 흔적은 깔끔하게 지워져 있었다.

방안에는 자신이 덮고 자던 이부자리와 하나의 베개가 놓여있을 뿐이었다.

물론 머리맡에 있던 자리끼까지도 온데간데 없이 정돈되어 있었다.

한철규가 일어난 기척을 눈치채고 방으로 고개를 디민 것은 변씨였다. 잘 잤느냐고 묻는 변씨의 얼굴에서도 지난 밤에 누렸던 난삽한 술자리의 징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대면은 오히려 거북하기 짝이 없었다.

한철규는 변씨를 외면한 채 윗도리를 뒤지며 담배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변씨가 먼저 담뱃갑을 내밀었다.

“눈이 많이 내렸어요.” 마당을 바라보는 창에 드리워진 커튼을 밀어내며 변씨가 중얼거렸다.

지난 밤의 포근했던 기운은 눈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며 얼른 마루로 나섰다.

변씨와 눈길이 마주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마루에서도 승희가 다녀간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침 부엌을 나서는 주인여자와 수인사를 나누었지만, 그녀 역시 시치미를 뚝 잡아뗀 무표정이었다.

“추운 마루에 왜가리처럼 모가지 빼고 우두커니 섰지말고 방으로 들어오시오. 승희를 찾는가 본데, 벌써 두시간전에 떠났으니까 지금은 주문진에 있을 거요.” 주인여자는 벌써 해장국 그릇을 올린 밥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한철규는 밥상을 뒤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남산골 샌님이라더니…, 대수롭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웬 주눅이 그렇게 드셨나? 뻔뻔스럽다고 헐뜯을 사람 없으니 그 멀쑥한 얼굴 좀 드시오. 고개 숙일 사람은 따로 있는데, 한선생이 왜 고갤 숙이나. 알고보면 그것도 월권이오.” “이 댁에서 담근 매실주에 완전히 항복해 버렸어요. 정신 차릴 겨를이 없었어요. ” “우리가 여기 있다는 전화는 내가 했어요. 승희 그 년의 빤한 속셈을 내가 몰랐겠소. 한선생이 오던 첫날부터 눈치가 싹 달라졌어요.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대국놈이 먹는다더니 또 그 짝이 났소. 하지만 게거품 물고 있는 박길동이란 놈하고, 내 말이라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깐족거리는 윤종갑 (尹鍾甲) 이란 놈이 닭 쫓던 개꼴이 되어 허공만 바라볼 걸 생각하니 똥창으로 바람든 것같이 속시원하군…. 승희란 년도 성깔 하나는 당차고 암팡지더구만. 내가 빤히 보고 있는 면전에서 취한 한선생에게 추파를 던지고 아양떠는 꼴이 나하고는 처음 만난 객지놈처럼 안면을 싹 바꿉디다.

마음을 삼백육십도로 바꿔 먹고 통기해준 나를 아는 척도 안하는 매몰찬 년이 어디 있겠어요. 그 덕분에 장차 공짜술은 얻어 마시게 되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술김에 저지른 일이어서 개운치가 않아요. 미안합니다.” “이런 젠장, 건망증이 있나. 밤새 유람선은 혼자 타고 일어나서 엉뚱한 소린 왜 하시오? 하긴 박길동이란 놈 때문이겠지. 내가 닭새끼들처럼 텃세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 놈은 서울서 주문진까지 밤낮으로 내왕하면서 하룻밤에도 계집 두 셋은 거덜내고 다니는 바람둥이기 때문에 주머니를 까뒤집어도 먼지만 풀썩거리는 놈이란 말이오. 내가 그런 놈에게 승희를 내줄 수 없어서 자청하고 저지른 일이니 한선생이 주눅들 건 없소. 하지만 나만 알고 입을 다물고 있을 테니 한선생도 딱 잡아떼고 눈치채지 못하게 처신해야 되겠지. 내막을 알게 되는 날엔 필경 칼부림이 벌어질거요.” 그리고 벌떡 일어나더니 부엌에서 맥주 한 병을 들고 들어왔다.

이가 시리도록 찬 그 맥주병 주둥이에 입을 대고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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