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엄정함이 수사 성패의 관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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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 관련된 검찰의 수사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고 있다. 검찰은 그제 국세청을 압수수색한 데 이어 어제는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의 자택·사무실 및 그와 거래한 사람들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새로운 수사의 타깃은 이명박 대통령의 오랜 친구인 천신일 회장이다.

천 회장에 대한 수사는 박연차 관련 수사의 3라운드인 셈이다. 추부길 전 청와대 비서관이나 이광재 민주당 의원 등 여야 정계인사에 대한 초기 수사는 몸을 푸는 1라운드에 불과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2라운드 수사는 좀 더 복잡하고 힘들었을 것이다. 3라운드는 소위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라는 점에서 이전과 다르다. 노 전 대통령은 이미 지나간 권력이기에 아무래도 수사에 부담이 덜했을 것이다. 실제로 검찰이 수사과정에서 범죄혐의를 입증하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사람을 불렀고, 연관된 자료를 샅샅이 다 뒤졌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천 회장은 명실공히 현 정권의 실력자로 꼽힌다. 현직 대통령과 그냥 친한 친구 사이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론 반세기를 서로 돕고 의지해온 대학 동기동창이다. 정치적으론 지난 대선 과정에서 대통령 만들기에 혁혁한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사실상 후원회장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각종 인사과정에서 천 회장의 영향력이 미친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검찰이 정치적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차피 천 회장을 비켜갈 수는 없었다고 본다. 천 회장은 박연차 회장과도 매우 막역한 사이다. 개인적으로 천 회장은 박 회장의 고향 선배이자 친구의 형이다. 박 회장은 천 회장을 친형님 이상으로 깍듯이 대해 왔다고 한다. 노무현 정권에서 실세로 행세해온 박 회장 입장에서 볼 때 천 회장은 정권교체라는 위기국면에서 활로를 열어준 새로운 귀인이었을 수 있다. 실제로 박 회장은 지난해 여름 국세청의 세무조사가 시작되자 천 회장에게 무마용 로비를 부탁했다. 그 과정에서 돈을 주고받은 의혹을 사고 있다.

천 회장에 대한 수사의 어려움은 국세청 조사 에서 이미 확인됐다. 검찰이 국세청을 압수수색한 결과 국세청은 박 회장에 대한 세무조사 과정에서 확보한 자료 가운데 천 회장 관련 부분을 검찰에 넘겨주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국세청이 검찰에 고발하는 과정에서 천 회장 관련 자료가 누락된 것이다. 천 회장의 정치적 비중과 영향력 때문에 국세청이 제 구실을 안 하거나, 못한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검찰의 손에 맡겨졌다. 검찰은 천 회장의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엄정한 수사태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국세청이 감추었던 천 회장의 로비·금품수수 의혹을 명백히 밝혀야 한다. 국세청이 왜 감추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마지막 4라운드도 남아 있다. 박 회장의 돈을 받은 검찰 간부에 대한 수사다.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겪어야 한다. 검찰 수사의 공정성에 대한 판정은 4라운드까지 지켜본 다음 국민이 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