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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호의 뉴욕읽기]홍등이 꺼진 거리엔 詩心의 등불 켜지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9면

맨해튼 42번가.

'보통남자' 에게 그곳은 한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다.

온갖 해괴한 (?) 물건들이 모여있는 이른바 '섹스 숍' 이 줄지어 있고, 그들의 표현을 빌면 '화끈한 (트리플 x:미성년자 절대, 절대, 절대 불가!)' 음란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또한 다양한 살빛의 여인들이 누드로 춤을 추고, 시간에 따라서는 남녀가 나와 실연을 보여주는 '라이브 쇼' 도 공연된다.

그런가 하면 번쩍거리는 간판들 아래에서 행인들에게 수상쩍은 물건을 팔려고 서성이는 군상들, 술병을 종이봉투로 감싸쥐고 대낮부터 흔들거리는 알코홀릭들, 하릴없이 모여 떠드는 이상한 차림의 젊은이들, 그런 풍경들 때문에 선뜻 접근하기가 주저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42번가와 만나는 9번 애비뉴에 전국의 도시와 연결되는 버스 터미널이 있고, 그 반대쪽으로는 유명한 타임스 스퀘어로 이어지기 때문에 사람의 통행이 많은 곳이다.

특히 출퇴근 시간에는 엄청난 수의 사람이 그 길을 지나다닌다.

그런데 그 거리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다.

검사 출신 새 시장 루돌프 줄리아니가 들어서더니 그의 '범죄 없는 뉴욕시, 청결한 뉴욕시' 라는 공약을 실천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대한 상가가 들어서기로 한 계획이 추진되면서 음란영화와 쇼가 공연되던 극장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길은 잠깐 사이에 썰렁해졌다.

요란스레 번쩍거리던 불빛들과 네온이 사라진 저녁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낱자를 연결해 새로 상영되는 영화의 제목을 써놓거나, '이국소녀, 환상적 자태!' 어쩌구 하는 글씨가 붙어있던 간판도 텅 비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텅 비었던 간판에 하나 둘 글자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무심코 지나치던 사람들의 눈에 어느날부턴가 그 글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웃집 차에 어느 먼 교외에서 실려온 첫눈 아름다웠다.

그것은 시였다.

유심히 보니 '42번가의 하이쿠 (HAIKU ON 42ND ST.)' 라는 간판이 보였다.

물에 비친 내 모습 버스에 튀겨 내 바지를 적시네 '포르노' 간판이 '시' 간판으로 바뀌고 있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이거야말로 시의 실현 (實現) 이 아닌가.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봤다.

하이쿠협회 (Haiku Society of America)에서 뉴욕시에 허가를 얻어 그것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시 (市) 와 시인 (詩人) 의 합작품이었다.

보름달 빛 전화응답기의 낮고 풍부한 목소리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들. 도시 감각 위에 빛나는 위트. 이제 그 길을 지나는 것이 즐거워졌다.

아 아, 이래서 사람들이 “아이 러브 뉴욕” 이라고 말하는구나. 오늘도 사람들은 버스에서 내려 분주히 제 갈길로 간다.

저 바쁜 발걸음 중에서 단지 몇 사람이라도 시를 읽고 웃음을 머금으리라. 그리하여 뉴욕시는 보다 인간적인 곳으로, 인간이 사는 도시로 다시 태어난다.

〈이태호〉

◆새 칼럼의 필자 이태호씨는 1951년생, 홍익대 미대와 대학원 조각과를 졸업했다.

'후기조각회' '현실과 발언' 동인에서 위트와 유머로 사회문제를 풍자한 작품을 내 주목을 받았다.

재학중 신춘문예 소설이 당선됐으며 중앙일보 '계간미술' 기자를 거쳐 86년 도미. 하트포드대.뉴저지대학원에서 수학했다.

뉴욕을 중심으로 개인전과 '인종차별반대작가전' '얼굴전' '이민전' 등 그룹전에 참가.

현재 뉴욕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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