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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문화유산 답사기]6.정릉사…동명왕願刹 첫확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동명왕릉 주차장에 도착해 차에서 내려 관람객 진입로를 돌아서는데 길가에 작은 비석 하나가 곱상한 연꽃무늬 돌받침 위에 얹혀 있는 것이 보였다.

조선시대에 세운 하마비 (下馬碑) 였다.

유물에도 팔자가 있다는 것이 평소 내 생각이었는데 이 하마비는 오늘날까지 용케도 살아 남아 별 수 없이 하차비 (下車碑)가 됐다.

그렇다면 저기 쓰여있는 “대소인원 개하마 (大小人員 皆下馬)” 를 이제는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다 차에서 내려라” 로 번역해야 겠다.

동명왕릉 입구 오른편으로는 정릉사 (定陵寺) 라는 새 절이 있다.

옛날 동명왕릉의 능사 (陵寺) 로 세웠던 고구려시대 절간을 복원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절이 정릉사라는 것을 알려준 것은 깨진 질그릇 파편 한 조각이었다.

그러니 유물에 팔자가 없다고 할 것인가.

정릉사는 동명왕의 명복을 빌고 동명왕릉을 지키기 위한 나라의 원찰 (願刹) 이었다.

그래서 정릉사는 여느 절과 격이 달랐다.

그러나 정릉사는 또다른 이유로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퇴락의 길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통일국가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고구려의 이미지를 제거해야 했으니 정릉사가 무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정릉사는 일찍 폐사 (廢寺) 됐고 지금 우리는 정릉사에 대해 아무 기록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은 꼭 문자로 기록한 것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다 바스러진 기왓장 하나, 동강난 사금파리 하나로도 가늠할 때가 있다.

그것은 고고학과 미술사의 임무다.

정릉사의 존재가 확인되고 지금 그것을 복원할 수 있게 해 준 근거는 1974년 발굴 때 절 뒤편 우물에서 '능사' '정릉' 이라고 쓰여진 질그릇 파편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하잘 것 없는 것이 여기가 정릉사 자리고, 저 위쪽 커다란 봉분의 무덤이 동명왕릉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준 것이다.

깨진 질그릇 파편 하나가 이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고, 이 엄청난 대역사 (大役事) 를 일으켰던 것이다.

정릉사는 전형적인 고구려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정릉사는 한차례 창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여러번 증축과 개축이 있었던 모양인데, 결론적으로 처음에는 사당으로 출발해 능사로 승격되고 아울러 왕실의 별전 (別殿) 이 부속건물로 세워졌으며 나중엔 다시 사찰로 환원됐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래서 정릉사터 주춧돌의 배열상태는 매우 복잡하고 아주 넓다.

크게 5구역으로 나뉘며 확인된 건물만도 18채, 회랑 (回廊) 이 10개, 총면적 약 9천평이 된다.

경주 황룡사터와 비슷한 면적이다.

그러나 지금 복원해 놓은 정릉사는 그중 가장 핵심적인 공간, 그러니까 탑을 중심으로 한 기본 골격만 세운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형적인 고구려식 가람배치다.

절간 건축의 최소한 기본요소인 중문 (中門).탑.금당 (金堂).강당을 남북 일직선의 축선상에 두고 울타리는 회랑으로 두르는 것은 고구려.백제.신라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탑을 중심으로 해 금당을 동서로 두 채를 더 배치해 1탑 3금당으로 힘을 주었다.

탑을 끼고 디귿자로 돌았다고 해 회탑식 (回塔式) 이라고 한다.

이는 평양 청암리의 금강사 (金剛寺) 터와 기본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백제의 절간은 부여 정림사터가 말해주듯 남북 축선상에 건물을 배치하는 것 이외의 아무런 수식이 없다.

그래서 단순함을 멋으로 승화시키는 세련된 감각이 살아있다.

또 신라의 절은 경주 황룡사터가 보여주듯 1탑 3금당식인데 병렬식으로 늘어놓고는 나중엔 종루와 경루를 추가해 대단히 화려한 감각을 구사했다.

삼국의 미술은 이처럼 절간배치에도, 왕릉 무덤무지에도, 기왓장 무늬에도 달리 나타났으니 이런 것을 우리는 문화의 차이라고 한다.

나는 복원된 정릉사를 얼른 둘러보고는 바로 뒤편으로 나왔다.

복원된 정릉사는 비록 8각7층석탑이 목탑으로 세우지 않은 잘못을 범하고 있지만 기둥과 공포, 지붕과 단청 등을 고구려 고분벽화에 근거해 고구려 맛이 나게 하려는 노력이 읽혀지고 있으니 그 분위기를 맛본다는 것은 귀중한 경험이다.

더욱이 건축의 경우는 규모 (스케일)에 대한 감각을 익히는 것이 중요함을 잘 알고 있기에 조목조목 따져도 보았다.

그러나 나는 본래 유물의 복원이나 복원된 유물엔 큰 관심이 없다.

내 주장이라는 단서아래 하는 얘기지만 현대사회가 할 일은 창조이지 과거의 복원이 아니다.

유물과 유적은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며 복원은 일종의 파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우리는 모름지기 폐허의 주춧돌과 기왓장까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역사의 상처를 껴안고 살아야 한다.

정릉사 뒤편에는 그 '위대한' 질그릇 파편을 부둥켜 안고 1천년을 견뎌온 정말로 위대한 우물이 있다.

우물가에는 돌 잘 다루던 고구려사람들이 성 (城) 돌처럼 가지런히 쌓은 물도랑도 있고, 그 옆으로는 신기하게도 온돌자리가 굴뚝터와 함께 남아 있다.

잔디밭에는 동그랗고 네모나고 또 막돌로 야무지게 다져놓은 주춧돌이 한낮의 태양아래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중 가장 멋있는 것은 역시 우물이었다.

장방형의 넓적한 화강석으로 이를 꽉 맞춰 정8각형으로 세운 우물과 우물가에 넓게 깔아놓은 두툼한 고구려 전돌들은 고구려의 정서가 어떤 것인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우물 안엔 상기도 샘이 솟고 있었다.

우물 뒤쪽 언덕으로는 키 작은 대추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나는 나무 그늘에 앉아 우물 한번 쳐다보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온돌 한번 쳐다보고, 도랑 한번 쳐다보며 대구에 있는 나의 제자들과 서울에 있는 답사회 회원들을 생각했다.

돌이켜보건대 내가 그동안 답사다니며 나의 제자, 나의 회원들에게 안내한 곳은 조선시대.고려시대.통일신라시대.신라시대.백제시대.가야시대, 그리고 청동기시대 유적들이었을 뿐 고구려시대 답사는 아주 드물었다.

그런 생각이 있기에 충주 중원의 고구려비와 단양 영춘의 고구려산성인 온달산성을 곧잘 답사일정에 넣곤 해 온 것이다.

그런 것으로 고구려의 기상과 멋을 느끼려고 했고, 딴에는 그런 노력으로 뭔가 했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내 지금 이 정릉사의 뒤편 우물가에 앉아 저 힘있게 다듬은 고구려 석공의 손길을 생각하자니 그간 내가 맡아보려던 고구려 냄새는 정말로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나는 내 곁에 나의 제자와 나의 회원이 없는 것이 너무도 허전하게 느껴졌다.

말없이 절간 뒤편에 나와 이 외진 나뭇그늘에 마냥 앉아 있으려니 함께 간 통일문화연구소 김형수 (金炯洙) 차장이 나를 찾아 장난스럽게 재촉했다.

“교수선생, 여기서 뭐하고 계십니까. 모두들 점심 먹으러 가자고 기다리는데.” “ '형수동무' 사진 취재는 잘 돼 갑니까?” 나 역시 장난기를 섞어 이렇게 묻자 金차장은 말없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우물에 각별히 신경 좀 써 주슈. 내 정릉사는 몰라도 우물 예찬은 꼭 한번 쓰고 싶으니.”

글 = 유홍준 〈영남대 교수·박물관장〉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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