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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 공포의 역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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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호 15면

『삼국지』를 영상화한 영화 ‘적벽대전II’에는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를 배로 실어 날라 적군을 공황 상태에 빠지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에 이미 전염병의 발병 과정을 이해했다는 뜻이다. 흔히 종두법은 영국 의사 제너가 만든 것이라 알고 있지만, 이란이나 인도에서는 고대 민간요법으로 오래전부터 시행되던 방법이었다. 중국에서는 화타가 결핵이 전염 질환이란 점을 알고 있었고, 7세기 의사 손사막(孫思邈)은 폐에 기생하는 미생물을 언급한 바 있으며, 12세기의 전을(錢乙)도 수두·홍역·성홍열·천연두를 감별했을 정도로 전염병에 대한 동양의학의 연구는 역사가 오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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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이 창궐하면 생산인구가 감소하고 사회가 불안해지면서 사회는 총체적 위험을 겪게 된다. 콜럼버스가 신세계를 발견한 이후 신대륙에서 옮겨온 매독은 유럽 의학계의 큰 골칫거리였고(베토벤·슈베르트·슈만이 모두 매독과 그 합병증으로 죽었다고 추측되고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 역시 구대륙에서 수입된 우두와 출혈열 등의 각종 전염병으로 급격한 붕괴를 경험해야 했다. 1763년 폰티액 전투에서는 천연두균이 묻은 담요를 인디언들에게 일부러 갖다 주어 승리를 이끈 적도 있다. 일종의 생화학전인 셈이다. 신대륙과 구대륙의 교류가 갑작스럽게 일어나면서 새로운 병원균에 적응할 시간이 없었던 이유도 있다. 여행이 잦은 21세기에는 이런 현상이 계속 일어나서 테러만큼이나 사람들을 공포에 빠지게 하는 것 같다.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로 인해 병이 발생하면, 숙주는 이에 적응해 면역성을 함께 키운다. 치사율이 높은 병원균은 숙주도 빨리 죽게 되니 그만큼 균의 소멸 속도 역시 빠르고, 반대로 생명을 앗아갈 정도가 아닌 순한 병원균은 숙주와의 힘겨루기 시간이 길어져 종국에는 면역력을 강화시키게 마련이다.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처럼 전염력과 독성이 급속히 형성된 균은 위협적인 만큼 금방 사라질 운명이었던 것이고, 증상이 가벼운 감기 바이러스는 숙주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니 지속적으로 인류와 공존하게 되는 것이다. 멕시코에서 발생한 신종 플루(인플루엔자A/H1N1) 역시 치사율이 높으면 높을수록 금방 없어질 것이고, 그 반대일 경우 우리나라에 건너올 때쯤이면 훨씬 그 독성이 떨어질 것이다. 물론 철저한 방역과 검역이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집단 히스테리 반응으로 몰고 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 무렵엔 유대인이나 집시 등 소수민족들이 병을 일으킨 원인으로 지목되어 집단 학살당한 바 있고, 중세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도 많은 여성이 병을 불러온 마녀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바 있다. 예컨대 미국 동부의 세일럼에서는 호밀에 핀 곰팡이균으로 인해 신경병이 돌자 죄 없는 여성들을 마녀로 지목하기도 했다. 불합리한 공포와 분노가 어디로든 분출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병의 양태를 잘 모르는 상황에서 전염병이 돌면 현대인도 건강 염려증에 걸리기 쉽다. 따지고 보면 질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유사 이래 인류를 자유롭게 놓아 둔 적이 없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우리의 알량한 지식을 조롱하듯 새로운 병원균이 또다시 생성되는 것은 자연을 함부로 대하는 인간의 오만한 행동을 반성하게 하는, 꼭 필요한 자연의 조화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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