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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금발 아닌 검은 머리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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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호 10면

1 앨리스 리델의 사진

우리나라에서는 어린이날 전날이기도 한 5월 4일은 전 세계 동화 팬들에게 특별한 날이다. 앨리스가 흰 토끼를 뒤쫓다가 기나긴 토끼굴을 통해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 모자 장수의 미친 다과회(사진 4)나 하트 여왕의 이상한 재판에 가게 되는 게 바로 이날이기 때문이다.체셔 고양이의 말마따나 “너나없이 미친” 이 이상한 나라에 대한 괴이한 동화가 1865년 영국에서 처음 출판되었을 때 빅토리아 시대의 따분한 교훈 동화에 하품하던 아이들은 열광했다. 옥스퍼드대의 괴짜 수학자 루이스 캐럴(본명 찰스 L 도지슨·1832~98)이 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그 기발한 상상과 유머로 지금까지도 수많은 예술가와 과학자를 매혹하고 있다.

문소영 기자의 대중문화 속 명화 코드

초현실주의 미술가 살바도르 달리는 머리와 두 손이 장미꽃 다발로 된 소녀가 줄넘기를 하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앨리스 조각(1977)을 제작했고, 캐럴처럼 수학자인 마틴 가드너는 이 동화의 여러 난해한 농담에 상세한 배경 설명을 붙여 『주석이 달린 앨리스』(1960)를 펴 냈다. 그리고 영화감독 워쇼스키 형제는 세기말을 휩쓴 SF ‘매트릭스’(1999) 도입부에서 “흰 토끼를 따라가라”는 암호를 등장시키지 않았던가.이렇게 현대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동화의 주인공 앨리스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앞치마가 달린 푸른 원피스를 입은 긴 금발의 소녀를 떠올릴 것이다.

2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삽화 - 가짜 거북과 그리폰 (1865), 존 테니얼 작

이런 이미지가 박히게 된 것은 무엇보다 1951년 나온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사진 3) 때문이겠지만, 그 전에 나온 수많은 책 삽화에도 앨리스는 대개 원피스를 입은 긴 금발머리 소녀로 나오곤 했다. 하지만 앨리스의 실제 모델인 앨리스 리델(1852~1934)의 모습은 전혀 달라 검은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사진 1). 앨리스 리델은 캐럴이 수학 교수로 일하던 옥스퍼드대 학장 리델의 딸들 중 하나였다. 캐럴이 어느 화창한 여름날 이 아이들과 뱃놀이를 하면서 즉흥적으로 들려준 이야기가 바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시초였다.사진 속 앨리스 리델의 새침한 검은 단발머리는 꼬마 아가씨의 총명해 보이는 강렬한 눈매와 어우러져 긴 금발머리보다 훨씬 인상적이고 매력적이다. 이런 점 때문에도 캐럴이 앨리스 리델을 그토록 사랑했던 것이 아닐까.

3 월트 디즈니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951)’의 한 장면

캐럴은 앨리스를 포함한 여자 아이들을 무척 사랑했고 또 평생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후대에 와서 롤리타 신드롬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아이들에게 성적으로 부적절한 행동을 한 적은 한번도 없었고, 단지 그들과 퍼즐·언어 유희를 하면서 함께 노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 캐럴이 누구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 앨리스 리델이었는데, 이 소녀에 대한 그의 애정은 단지 어른이 아이를 귀여워하는 차원을 넘는 강렬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어떤 성적인 측면이 있었던 것도 아닌, 아주 기이한 사랑이었다고 마틴 가드너는 말하고 있다. 캐럴이 앨리스 리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동화 속에서 앨리스가 토끼굴에 빠진 날이 5월 4일로 설정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5월 4일은 바로 앨리스 리델의 생일이었다!

4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삽화 - 미친 다과회 (1907), 아서 래컴 작

그런데 앨리스 리델이 이렇게 검은 단발머리였다면, 대체 우리에게 익숙한 긴 금발을 한 앨리스의 이미지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존 테니얼(1820~1914)이 그린 최초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삽화(사진 2)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삽화를 보면 디즈니 애니메이션 속 앨리스의 복장이 테니얼의 그림을 거의 그대로 따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테니얼은 당대의 주간지인 ‘펀치(Punch)’에서 시사만화가로 활약하고 있었는데, 그의 재치 넘치는 그림이 역시 기이한 상상으로 가득 찬 캐럴의 동화와 만나면서 매력적인 삽화를 탄생시켰다. 그 한 예가 바로 앨리스가 ‘가짜 거북(mock turtle)’을 만나는 장면이다(사진 2).가짜 거북은 대체 무엇일까? 영국에는 가짜 거북 수프라고 해서 거북 대신 소고기를 넣고 거북 수프 비슷하게 만든 것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캐럴은 가짜 거북 수프의 재료인 가짜 거북이란 게 따로 있다는 기발한 생각을 했다. 그리고 테니얼은 그 가짜 거북을 거북 등껍질에 소머리를 가진 기괴한 동물로 멋지게 표현해 낸 것이다.

오래된 책의 최초 삽화는 새로운 삽화들이 나오면서 잊히기 마련이지만 테니얼의 삽화는 아직도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후의 수많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삽화가가 테니얼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대 최고의 동화 일러스트레이터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아서 래컴(1867~1939)의 ‘앨리스’ 삽화(사진 4) 역시 기본적으로 테니얼의 삽화 이미지를 바탕에 깔고 있다.


중앙데일리 경제산업팀 기자. 일상 속에서 명화 이야기를 찾는 것이 큰 즐거움이며, 관련 저술과 강의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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