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말 해체 동서증권 양궁팀, 감독집서 새우잠 동고동락 한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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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우리의 살 길은 양궁밖에 없다.” 지난해말 공식 해체된 동서증권 양궁팀이 '경기체육회' 란 이름으로 19일 개막된 제1회 실업실내양궁연맹전에 출전했다.

비록 소속은 없어졌지만 선수단은 흩어지지 않은 채 IMF의 삭풍을 견디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한달 가까이 서울도봉구창동 서오석 (41) 감독의 아파트에서 합숙하며 지난해 짜놓았던 계획대로 꾸준히 훈련을 계속, 양궁에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고 있다.

동서증권 양궁팀은 95년 국가대표 양궁감독인 서오석 감독과 전남자국가대표 전인수 코치, 바르셀로나올림픽 2관왕 조윤정과 강경옥.박명화.구미라.김민정 5명의 선수로 출범했다.

지난해 전국종별선수권대회에서 단체우승을 차지했으며 박명화가 실업연맹전에서 개인 우승을 차지하는 등 상당한 성적을 거뒀다.

특히 이들은 경기도군포의 동서증권 연수원에 마련된 전용훈련장에서 합숙훈련을 하며 최상의 시설과 최고의 대우를 받는 팀으로 다른 팀의 부러움을 샀었다.

그러나 지난해말 모기업인 동서증권이 부도를 맞으며 상황은 졸지에 변했다.

지난해 12월20일 동서증권은 갑자기 “연말부로 팀을 해체한다” 고 서감독에게 통보했다.

정식사원이었던 감독.코치와 조윤정.강경옥은 일반사원으로 회사에 남아도 좋지만 양궁은 못하며 촉탁사원인 나머지 세 선수는 팀해체와 함께 해고된다는 통지였다.

2년여동안 한식구처럼 지내왔던 선수단은 10일만에 모든 짐을 싸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그러나 서 감독은 “이대로 흩어지면 양궁인생은 끝” 이라며 선수들을 설득했고, 선수들도 “이렇게 헤어질 수 없다” 며 해산을 거부했다.

그러나 소속팀의 보호막이 없어진 이들에게는 매일 머무를 거처조차 없었다.

결국 결혼한 전인수 코치와 조윤정을 뺀 4명의 선수는 새해가 되자 서 감독의 32평 아파트 안방에 모든 장비를 쌓아놓고 새우잠을 자며 훈련을 시작했다.

훈련장은 인근의 서울시청 훈련장을 빌려 쓴다.

그러나 매일 태릉선수촌에서의 웨이트트레이닝도 빼먹지 않는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양궁을 포기할 수 없어요.” 자신의 매달 연금을 선수단 훈련비로 내놓은 조윤정은 후배선수들과 함께 굳은 결의를 다지고 있다.

왕희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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