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다른 듯 닮은꼴 전직 대통령의 추락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2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30일 대검찰청에 도착해 포토라인에 서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뉴스 분석같기도 했고 다르기도 했다. 전직 대통령들의 검찰 출석은 세 번째다. 집을 나설 때 장면은 달랐다. 1995년 12월 전두환 전 대통령은 1800자의 골목 성명서를 읽었다. 30일 아침 노무현 전 대통령의 소회는 세 마디였다. 인터넷 정치의 달인에게 성명서 낭독은 어색하다. 대신 그가 선택한 간결함은 강렬했다. “국민 여러분께 면목이 없습니다.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의 얼굴에는 회한과 비감이 섞였다. 씁쓸하고 겸연쩍은 미소가 스쳐갔다. 그리고 “가서 잘 다녀오겠습니다.” 마지막 한마디는 법리 논쟁의 자신감, 무혐의에 대한 자기 확신일 것이다.

오후 1시20분 대검청사 도착 때 그의 표정은 굳었다. 율사로서 방어 본능이 은근히 되살아난 것인가. 착잡함 속에 결연함도 표정 한쪽에 드러났다. 그가 섰던 포토라인은 불명예 의전이다. 그 순간은 짧지만 그 하루를 가장 길게 만든다. ‘권불(權不) 5년, 권력 무상’을 실감나게 했다.

14년 전 전두환의 골목 성명은 저항이었다. “과거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맞섰다. 그리고 고향 합천으로 내려갔다. 김영삼의 문민정권은 군사정권의 상징을 체포·압송했다. 역사 진전의 거센 굉음이 울렸다.

긴박감은 달랐다. 그때 군사반란 수괴 혐의(전 전 대통령)는 거창하면서 낯설었다. 지금 진실게임의 주요 명제는 ‘아내의 일을 남편은 몰랐다’는 것이다. 소박하지만 구차한 삼류 드라마다. 그 차이만큼 긴장감은 질적으로 다르다. 노무현 패밀리가 받은 뇌물 액수는 상대적으로 적다. 전두환·노태우 정권식의 정경 유착은 아니다. 하지만 권력 부패는 기괴한 변종을 했다. 지방 토호 같은 기업인들과 결탁했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건넨 1억원짜리 명품시계 선물은 변종의 선명한 사례다.

노무현의 정치적 삶은 롤러코스터다. 반전과 곡절로 어지럽다. 5공 청문회 스타→낙선·당선의 교차→ 대통령, 그리고 그의 표현대로 수렁에 빠졌다. 추락의 핵심 원인은 인사 실패다. 노 정권의 권력 이너서클은 코드, 친노 순혈주의다. “그들은 도덕성의 배타적 우월감, 이념의 편견으로 동굴의 우상에 사로잡혔다. 위선과 패거리 의식은 커졌다.”(고려대 김호진 명예교수).

그들의 잣대는 이중적이었다. 자기편의 반칙과 특권은 온정주의로 감쌌다. 박연차·강금원 회장한테 돈을 받은 것에 대해 “의리와 후원, 생계형 범죄”라는 시각은 그런 데서 비롯된다. 그 시절 민정수석실은 엉성했다. 노건평씨의 부패를 막지 못했다. 친인척 감시의 민정 라인은 실세인 문재인·이호철씨가 주도했다. 임무 수행에 실패했다. 하지만 친인척 관리는 대통령의 의지에 달려 있다. 노 전 대통령은 건평씨를 “별 볼일 없는 시골 사람”으로 옹호했다.

퇴임 후의 특별한 야심은 탈선을 초래한다. 연세대 최평길 명예교수는 “노 전 대통령은 전직의 독특한 역할 모델을 만들려 했다. 이를 위해 상당한 돈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퇴임 6개월 전 박·강 회장, 정상문 당시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모였다. ‘노무현 재단 설립’을 모색했다. 거대한 사저, 인터넷 정치, 봉하마을 관광지 개발이 핵심 프로젝트였다. 한쪽에선 돈 거래가 시작됐다.

노 전 대통령과 검찰의 진실게임 최종 결과는 미지수다. 하지만 퇴임 후 구상은 망가졌다. 600만 달러의 종착역이 노 전 대통령으로 입증되든 아니든, 구속이든 아니든 마찬가지다. 그의 지지자들은 탄핵 정국 때의 극적인 역전극을 회상한다. 그때는 살아 있는 권력이어서 가능했다. 바뀐 세상은 싸늘하다. 노사모의 노란 풍선, 장미 던지기는 그들만의 이벤트다. “도덕성이란 정치 밑천은 만회가 힘들 정도로 거덜났다. 노무현 권력의 동력이었던 386 운동권 정치의 막은 내린 것이다.”(한국외대 김형인 교수)

전직 대통령의 검찰 출두는 추종 집단에도 치명상을 입힌다. 5공 출신들은 정치 재기에 실패했다. 친노 386은 ‘노무현 가문의 후예’로 자처한다(측근 안희정씨의 표현). 그들의 위기 탈출도 쉽지 않다. 노 전 대통령의 하루는 14년 전과 다르다. 하지만 그와 그 집단에 예고된 정치 운명은 비슷하다.

박보균 정치분야 대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