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1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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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제1장 슬픈 아침 ⑫

어물전 구경이나 해보라는 식당주인의 성화에 못이겨 그는 비릿한 갯내음이 가시지 않은 어판장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투박하지만 속사포처럼 직설적으로 쏘아대는 어부들의 생경한 말투, 그들의 옷소매에서 진하게 묻어나는 갯내음, 해가 뜬 이후까지도 좀처럼 소진될 것 같지 않은 부두의 억세고 난삽한 활기도 지금의 그에겐 모두가 시들할 뿐이었다.

그런데도 쉽사리 주문진에서 떠나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우연이긴 하겠지만, 자신을 이곳으로 끌어당긴 것은 무엇일까. 오래도록 부두를 서성거리며 자신에게 던지고 있었던 질문이었다.

정오께가 되어서야 그 질문에 대한 희미한 대답이 떠올랐다.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조부 (祖父) 의 태자리가 양양읍내를 지난 물치리라는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서둘러 버스 정류장으로 찾아갔다.

물치리의 방향을 묻는 그에게 길을 가르쳐준 노인은, 일제시대때는 강릉장 다음가는 규모의 큰 저자가 물치장거리였다고 말해주었다.

장꾼을 굳이 선질꾼으로 부르기로 고집했던 노인의 말에 그는 더욱 솔깃해졌다.

아버지가 들려준대로라면, 그의 조부는 물치리 5일장을 정기적으로 드나들었던 선질꾼이었다.

잡아탄 버스는 양양 시가지를 벗어나 북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맑디맑은 녹색 바다가 오른편 차창 밖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낙산사를 지나 다시 3㎞ 정도, 육교가 보이는 지점에서 그는 버스를 내렸다.

노인이 일러준대로였다.

겉치장이 요란한 횟집들이 드문드문 들어선 물치리에는, 지난날에 있었다는 항구의 모습은 물론이었고, 흥청거렸던 저자거리의 흔적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썰렁한 폐허감이 오히려 스산한 심정의 그와 걸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황량한 들녘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어릴 적에 들었던 물치리 장터 모습을 속으로 조합하고 있었다.

옛날의 장돌림들은, 원통장을 시작해서 양양장, 그리고 물치장, 고성군 교암리에 있는 다리바우장, 간성장의 순으로 장돌림을 했었다.

발짝을 떼어놓을 때마다, 똥끝에서 된똥이 들락날락하도록 잔뜩 장짐을 지고도 하루에 1백20리길을 일같잖게 걸었던 그때의 장돌림들을, 이곳에선 선질꾼이라 불렀다.

그들은 인제와 원통에서 곡식을 지고 해거름녘에 출발하여 꼭두새벽에 물치리 포구의 해물저자에 당도했다.

그리고 가져온 내륙의 곡식을 미역과 멸치와 명태, 그리고 강현면 정암리에서 화염 (火焰) 으로 생산되었던 소금으로 바꾸었다.

그들이 다시 한계령을 넘어 내륙으로 돌아갈 때는 한결같은 생선짐이었다.

양양에서 북쪽인 고성은 인적이 드물었기 때문에 다른 고을보다 보릿고개를 넘기기는 수월한 편이었다.

그러나 해풍 때문에 풍년이 드는 해가 거의 없었다.

서리가 일찍 내려 흉년이 들면, 그해 겨울부터 한계령을 넘나드는 선질꾼들의 수효가 갑자기 불어났다.

원통방면에서는 콩이나 팥 같은 곡식을 지고 왔지만, 일제때는 사사로운 곡식거래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순검들의 감시망을 따돌리며 숨어 다녀야 했다.

그래서 때로는 빼앗으려는 순검들과 빼앗기지 않으려는 선질꾼들 사이에서 피가 튀어 낭자한 싸움판이 한길바닥에서 벌어지곤 하였다.

양양에서 내륙을 겨냥하고 출발한 그들이 첫 주막과 만나는 곳은 서림 (西林) 이었다.

그곳에서 가지고 가는 물화의 품목과 이문을 따져, 서쪽인 기린 (麒麟 : 지금의 현리) 으로 출발하는 패와 남쪽인 갈천 (葛川) 으로 가야할 패로 나누어졌다.

갈천으로 발행한 패는 약수산 (藥水山) 을 넘어 홍천장 (洪川場) 터로 가려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말대로라면, 그의 조부는 열여섯살 때부터 물치어장을 비롯한 홍천 등지의 장터를 조랑말 두 필로 발서슴한 소문난 선질꾼이었다.

그때는 대개 밤길을 도와 이동했으므로 그의 조부가 격투를 벌여 사로잡은 호랑이도 둘이나 되고, 개호주까지 합치면, 그 가죽이 한 죽은 될 것이라 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텅 빈 들에 혼자 서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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