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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지금은 네탓타령 할때 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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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나라 안팎이 한창 시끄럽다.

멀쩡하던 회사가 갑자기 부도를 내더니 이제는 나라까지 부도가 난다고 야단이다.

그렇지 않아도 소란스러운데 외신까지 이러쿵 저러쿵 부채질해대고 있다.

여기에 일부 언론 및 여론층이 문책론을 거론하며 마녀사냥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금번 경제위기는 국론을 통일시켜 돌파해야 하는데 '내탓' '네탓' 하며 세상을 더욱 혼란스럽게 해서는 안된다.

오늘의 위기는 몇사람의 잘못 때문이 아니다.

그간 누적돼온 문제가 일시에 불거져 나타났을 뿐이다.

70년대 우리는 세계인의 놀라움과 주목을 한몸에 받은 적이 있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 이라 불리는 우리의 경제적 성공이 전세계 개도국의 선망의 대상이 됐다.

많은 외국인이 한국을 배우러 오기도 했고, 많은 학자가 한국에 대해 책도 썼다. 당시 우리 경제는 실패를 모르듯 승승장구했다.

국민.기업.정부 모두 삼위일체가 돼 정말 열심히 일했다.

정부가 큰 밑그림을 그리면 기업은 이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국민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고 이를 뒷받침해줬다.

우리는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까지 느끼며 후손에게 좋은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다.

정치적 측면에서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적어도 경제에 관한한 모든 것이 선순환 (善循環) 하고 있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오면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과대포장하기 시작했다.

10.26, 12.12, 5.18을 거치면서 어려웠던 경제가 생기를 찾게 됐는데, 이것은 운좋게도 유가 (油價).금리.환율 등 소위 3저 (低) 호황의 훈풍이 불어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첫번째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되며, 이것이 곧 오늘 한국 경제 위기의 원인 (遠因) 이 됐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경제목표는 어디에 있고, 우리의 최대 경쟁자는 누구였던가.

일본이다.

당시 불어온 3저 훈풍은 우리 경제의 기반을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던 것이다.

3저 호기를 최대한 활용해 기술개발에 주력했더라면 오늘의 이런 사태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당시의 경제활황을 우리가 잘해 그런 것으로 착각하면서 첫번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두번째 실패는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났다.

민주화는 질서와 책임의 기초 위에서 발전하는 것이다.

이런 기초가 없이 무책임하게 전개된 민주화는 우리 사회를 극심한 혼란에 빠뜨렸다.

저마다 '제몫 찾기' 에 나서면서 사회를 지탱해오던 법과 질서가 무너지고 도덕윤리도 실종됐다.

정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공권력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근로자들은 고삐풀린 말이 돼 사장을 드럼통에 넣고 굴리는가 하면 더 많은 것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경제적 활력은 왕성한 창업의욕과 기업가 정신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기업인이 하루아침에 매도 대상이 된 상황에서 그 누가 자신의 재산과 생명을 걸고 기업을 하려 하겠는가.

이후 사명의식이 투철하지 못한 수많은 기업인이 회사를 정리하거나 서비스업종으로 전업하면서 우리 경제의 기반이 급격히 와해돼갔음을 우리는 똑바로 알아야 한다.

모두들 '제 잘난 줄' 착각 빠져 우리가 이런 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는 동안에도 일본은 끊임없이 기술개발에 주력하면서 경제를 발전시켜왔으니 우리와의 격차는 더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당시에도 소위 '신 (新) 3저' 라는 기회가 우리를 찾아왔기 때문에 경제가 거덜나는 화는 면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잘해나가는 줄 착각하면서 두번째 좋은 기회를 놓쳐버렸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문민정부에 들어오면서 또다시 치명적인 과오를 범하게 되는데, 이것이 오늘의 외환위기를 잉태시킨 세번째 실패인 것이다.

준비가 덜된 문민정부가 초기의 국민적 인기와 지지를 과신하면서 개혁다운 개혁을 하지 못했다.

걸핏하면 주무장관을 교체해대니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로인해 나온 것이 바로 정부 불신 풍조다.

여기에 사회수준과 동떨어진 높은 도덕률을 요구하면서 기업인.경제인을 홀대하고 천한 장사꾼으로 취급하니 누가 경제를 위해 노력하겠는가.

부당하게 치부한 사람이나 정당하게 돈을 번 청부 (淸富) 의 구분없이 부자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사회의 따가운 눈총을 받도록 분위기가 잡혀가니 누가 사업에 나서겠는가.

기대 많던 금융실명제도 과거의 발목에 잡히고 보니 경제의 투명화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여기에 우리가 일본을 따라잡을 마지막 5년의 기회를 이렇게 허송하면서 나타난 것이 한보.기아.진로.한라 등 대기업의 연쇄부도 사태다.

오늘의 외환위기도 실은 1년반전부터 거시경제지표.금융.실물경제 등의 부문에서 위험신호가 나타나고 있었건만 이를 태연히 보아넘긴 그 배짱은 또 무엇으로 설명해야 좋을지 당혹스럽기만 하다.

앞서 말한 세차례의 기회를 모두 허망하게 보내면서 우리 경제의 소중한 자산인 기업가 정신과 근로윤리는 실종됐고 남은 것은 고비용 저효율의 경제 시스템 뿐이니 한심하기만 하다.

한때 우리도 경제력면에서 선진국 수준에 도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적 수준은 너무나 열등해 결국 선진국 진입에 실패하고 국가 부도의 위기를 맞고 있다.

지적 수준은 2천달러에 불과한데 국민소득 1만달러시대를 맞이했으니 흥청망청 쓸 수밖에 없다.

세계여행이 봇물을 이루고 호화 사치품 수입이 극에 달하면서 여행수지 적자는 수십억달러가 되고 무역적자도 수백억달러가 됐는데 부도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할 수밖에 없다.

형편이 이런데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단죄할 것인가.

또 하나 우리의 지적 수준과 사회적 책임감에 대한 예를 들어보자. K증권이 도산한 바로 그무렵 일본의 대형 증권사인 야마이치 (山一) 증권도 도산했다.

도산이라는 결과는 같은데 도산 이후의 상황에서 우리는 너무나 부끄러운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야마이치증권은 사장이 나와 국민과 고객에게 눈물로 사죄했다.

직원들은 한점 흐트러짐 없이 예탁금 보호 등 마지막 서비스에 솔선하며 나섰다.

간부들은 부하 직원들의 일자리까지 알선해주고 물러났다.

이 과정에서 어느 누구도 회사를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간부는 고객에게 사죄하는 의미로 할복까지 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했는가.

K증권의 경우 예탁금을 찾기 위해 몰려온 고객들을 방치해 놓고 모두 본사로 몰려가 내 살길을 마련해 놓으라고 농성하지 않았던가.

외환위기의 서곡이 울리던 바로 그 시점에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은 업권 (業權) 이기주의를 앞세워 태업도 하고 심지어 여의도까지 원정가 농성하지 않았던가.

세상에서 이런 일을 태연히 해내는 나라는 우리 뿐일 것이다.

남을 탓하며 속죄양을 찾아 나서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보자. 우리 자신의 참모습에서 부끄러움을 발견할 수 없어야 비로소 당당히 경제파탄에 대한 책임을 거론할 자격이 있다.

물론 궁극적으로 책임은 지도자가 지게 돼 있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정치지도자.기업인, 그리고 교수를 포함한 지식인등 우리 모두가 먼저 참회하며 국민에게, 특히 성실하게 일한 근로자들에게 협조를 구하자.

송자 <명지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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