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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도 AS 되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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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홍준 기자

서울 신용산초등학교 학생들이 그린 ‘아빠’ 입니다


어느 아버지의 고백

“내 고민 알기나 해요?” 딸의 말은 비수였습니다

봄비가 내렸습니다. 마른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는 단비였지요. 그런데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건 어찌된 일일까요? 아랫도리 딸랑거리며 열심히 뛰어도 러닝머신 위를 뛰는 것처럼 별 성과 없는 요즘의 현실에 줄담배만 늘어날 뿐입니다.

전국의 아빠님!

축 처진 어깨로 퇴근하는 게 ‘일상다반사’가 된 지 오래죠? 그래도 우리에게는 자식들이 희망 아닙니까? 그런데 이 녀석들도 내 맘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제 중3인 큰딸이 새벽까지 공부를 하고 있기에 격려를 해주려고 방문을 열었더니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개인 홈페이지에 별 쓸데없는 글들을 올리고 있더군요. 느닷없는 배신감에 냅다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아빠는 이 어려운 시절에 식구들 먹여 살리려고 힘들게 일하는데 넌 뭐 하는 거야? 그렇게 해서는 외고는커녕 일반 고등학교도 힘들겠다! 일류 대학 3분의 1이 특목고 출신이라는데 성공하려면 그 정도 노력은 해야 되는 거 아니야?”

그런데 녀석의 대답은 비수가 되어 꽂혔습니다.

“아빠나 잘하세요. 만날 일찍 들어온다 거짓말하고 고주망태가 돼서 들어오면서. 다른 친구 아빠들은 수행 평가도 많이 도와준다던데 아빠는 해주는 게 뭐가 있어요? 내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는 알기나 해요? 아빠, 미워요.”

‘쾅’ 하고 닫힌 방문 앞에 멍하니 서 있다가 소주 한 병을 사들고 왔습니다. 아예 물컵에 소주를 부어 들고 베란다 앞에 섰지요. 가로등 빛을 받으며 나뭇가지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눈을 돌려 주변을 살폈습니다. 구석구석 정리되지 않은 너저분한 물건들. 지난 주말에 베란다를 치워달라던 집사람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떠올랐습니다.

깊은 숨을 몰아쉬고 나니 에어컨 실외기에 놓인 강낭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요즘 작은애가 학교에서 실험을 하느라 가져다 놓은 거겠지요. 젖은 솜 위에 몇 개의 강낭콩이 오순도순 모여 있었고 몇 놈은 싹을 틔워 제법 긴 줄기를 자랑하고 있더군요. 어설픈 뿌리와 떡잎을 달고 서 있는 가녀린 줄기.

새삼 생명의 신비와 경외감에 쭈그리고 앉았다가 그만 눈앞이 흐려졌습니다. 휘청휘청 볼품없이 일어서고 있는 강낭콩의 줄기가 마치 우리 애들을 보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아빠의 사랑이라는 자양분을 듬뿍 받고 자라나야 할 아이들을 그냥 내팽개쳐놨구나’.

“월급 가져다 주잖아”라고 소리 질렀던 게 겨우 강낭콩에 싹이 틀 만큼의 물만 준 것과 뭐가 다르냐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습니다.

회사에서의 위치, 업무나 인맥을 유지하는 것도 다 중요합니다. 하지만 가족보다, 가정보다 중요한 건 없다는 걸 이제 깨달았습니다.

오늘은 일찍 퇴근해야겠습니다. 요즘 꽃게 철이라는데 마트에 들러 꽃게랑 새우를 사들고 가야겠습니다.

우리 ‘강낭콩’들에게 영양을 줘야겠습니다. 아빠의 사랑이라는 영양을 말이죠.

전국의 아빠님. 오늘은 수요일. 스케줄 수첩을 꺼내 오후 6시 이후의 약속에는 가위표를 그으시죠. 그리고 저와 함께하십시다. 오늘 저녁은 우리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날입니다. ‘강낭콩’의 줄기가 굵어지는 날입니다.

회사원 김영채(42·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백석동)

‘업그레이드’ 우리 아빠

아빠가 달라지면 아이는 훨훨 날아요

“우리 아빤 거짓말쟁이예요. 주말에 놀러 간단 약속을 지킨 적이 없어요.”

“아빠가 툭툭 때리는데, 너무 아파요. 이젠 옆에 가기도 싫어요.”

“울 아빠는 술 취했을 때만 웃어요.”

서울 용산구 신용산초등학교 3, 5, 6학년 학생들이 그린 ‘2009년 일그러진 아빠들’의 모습이다. 열려라 공부팀은 지난 24일 이 학교 학생 15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였다. 학생들이 ‘지금의 아빠’에게 얼마나 만족하는지알고 싶어서였다. 결과는 참담했다. 80% 이상이 ‘불만족스럽다’고 답했다. 자정이 넘어서야 귀가하는 아빠, 술과 담배에 찌든 아빠, 주말이면 골프와 TV 시청에만 몰두하는 아빠 등. 문제는 아빠들의 이런 모습이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는 것이다.

항상 피곤한 아빠

설문조사에서 나타난 아버지들의 평균 귀가시간은 오후 10시였다. 30% 정도의 학생이 아버지의 귀가시간을 ‘자정 넘어’ 또는 ‘자고 있어 모른다’고 답했다. ‘항상 술에 취해 들어온다’ ‘주말에도 회사 사람들과 골프를 나갔다 술 마시고 밤늦게 들어온다’는 대답도 있었다.

아이들이 아버지를 생각하며 그린 그림은 더욱 심각했다. ‘주말에 아빠가 주로 하는 일’을 주제로 그린 그림에서 각종 술병이 널브러져 있었고, 주말이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자는 아빠와 소파에 누워 리모컨으로 TV를 돌리는 아빠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림 속에 비친 아빠들은 모두 피곤해 보였다.

그렇다면 그림에 나타난 아빠들은 왜 그렇게 피곤할까.

박재원(46) 비상 공부연구소장은 “아빠들은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밤낮으로 일하고 있다’는 걸 드러내고 싶어한다”며 “은연중에 ‘내가 피곤한 모습을 보여야 아내와 아이들이 나를 대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 중에는 늦게 들어가고, 주말에는 자는 게 습관화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다 보니 아빠들에게 있어서 사물을 대하는 우선순위가 뒤틀려 있다. ‘내가 먹여살리는데…’라는 생각 때문에 가족의 소중함보다는 회사·모임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에서 문제는 시작된다. 가족 구성원 내에서는 가장인 자신이 권력자라고 느끼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박 소장은 “아이들의 사회생활은 가족 구성원 간의 생활에서 시작된다”며 “초등 고학년이 되면 상당수 학생은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아빠와는 대화를 거부한다. 아빠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경직되면서 학교생활에서부터 폭력성이 두드러진다”고 말했다.

애정표현 서툰 아빠

회사원 박모(42·경기도 일산)씨는 요즘 초등학교 6학년 딸아이와 말 한마디 없이 지낸다. “공부 잘 되냐”며 말을 걸어도 딸은 아무 대답도 없이 자기 방에 들어간다. 벌써 2년째다. 딸은 “권위적인 아빠랑은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문제는 딸이 4학년 되면서 시작됐다. 고학년이 된 딸이 공부에 흥미를 보이지 않자 “뭐가 되려고 그렇게 공부 안 하냐”며 다그쳤고, 부인 남모(41)씨에게는 “집에서 애 하나 공부 못 시키고 뭐하냐”며 싸우기 일쑤였다. 아이는 점점 아빠에게서 멀어졌다. 급기야 엄마 남씨는 올해 초 딸의 일기장에서 “아빠가 싫다. 엄마가 불쌍하다. 나는 아빠 같은 사람이랑 결혼 안 해야지…”란 문구를 발견하게 됐다. 딸은 아빠를 적으로 대하고 있었다.

박씨 같은 아빠는 이번 설문조사에서도 흔한 경우였다. ‘언제 화를 터뜨릴지 몰라 무섭다’는 아이들도 있었고, ‘아빠는 소리 지르는 사람’, ‘아빠가 있으면 왠지 불안하다’고 표현한 경우도 있었다.

이에 대해 김병후(54·정신과 전문의) 박사는 “아빠들이 방법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똑같은 말을 하더라도 말투에 따라 아이가 받아들이는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남들보다 부족한 게 뭔데 공부를 못 하냐” “넌 공부하긴 다 틀렸다” 식의 강압적 태도는 오히려 반감만 일으킬 수 있다. 초등 고학년부터 중학교까지, 자녀들의 사춘기 시기에는 특히 주의해야 한다. 그는 “아이들은 눈에 보이는 사랑과 관심에 반응한다”며 “예쁘다고 힘을 줘 껴안거나 아무 생각 없이 툭툭 건드리는 것도 아이들에게는 큰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좀 더 부드럽게 다가가는 아빠가 되라”라고 조언했다.

소통방법 모르는 아빠

초등학교 2학년 아들(8)을 둔 최길규(48·서울 홍은동·회사원)씨. 마흔 살에 얻은 늦둥이 외아들이라 아이에 대한 사랑만큼은 그 누구 못지않다. 각종 장난감에 게임기와 컴퓨터까지 지금까지 아이가 사달라고 하는 건 말 한마디 않고 다 사줬다. 술자리를 즐겼던 최씨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난 뒤부터 주말에는 약속을 잡지 않는다. 아이도 아빠를 좋아하는 듯 보였고, 부자 사이에는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해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아빠와 노는 건 재미없다”며 아이가 아빠와 시간 보내는 것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주말이면 아빠가 집에 있어도 아이는 엄마(40)만 찾는다. 아들은 “엄마는 자동차놀이도 함께 해주고, 만들기 숙제도 같이 해주는데, 아빠는 못한다”고 말했다. 친구들과 노느라 주말에 집을 비우기도 한다. 아들에게 소외당했다는 생각에 최씨는 “주말이면 외롭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아이와 논다는 것은 소통하는 것이다. 달랑 주말에 가족과 저녁 식사를 같이하는 것으로 ‘가족과의 소통’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아빠는 도처에 널려 있다.

김 박사는 “요즘 아빠들은 아이와 놀아주는 방법을 모른다”며 “예전 아버지들에 비해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은 늘었으나 여전히 아이와 노는 것을 일로 생각하는 아빠가 많다”고 지적했다. 소통하는 방법을 모르는 데다 일로 여기기 때문에 아이와 가까워지는 데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그는 “물건을 사주고, 아이가 노는 모습을 보면서 ‘놀아준다’고 위안을 삼는 아버지들의 생각이 문제”라며 “아이가 흥미 있어 하는 놀이를 함께하면서 ‘우리 아빠도 이런 걸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해주는 것이 아이와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최석호 기자



☞ 왜 신용산초등학교를 선택했나= 경제적으로 중산층 이상이 거주하는 지역 학교다. 회사원부터 사업가까지 다양한 직업을 가진 아빠들이 있다. 대졸 이상 학력을 가진 학부모가 80% 이상이다. 열려라 공부팀은 흔히 만날 수 있는 서울 지역의 전형적인 초등학교라고 판단해 설문 대상으로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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