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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봤습니다] 최은혜 기자의 한양대병원 병원학교 일일봉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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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학교 문턱을 넘다

병원학교는 만성질환 치료나 장기입원으로 인해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없는 학생들을 위해 병원 내에 설치된 학교를 말한다. 한양대병원 병원학교장 이영호 박사(소아청소년과)는 “아이들이 긴 병원 생활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갔을 때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질병의 치유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누리봄교실은 소아·청소년과 혈액·종양 병동과 함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향 교무부장이 “이곳에 오면 손부터 씻어야 한다”며 세면대를 가리켰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인데도 와서 책을 읽는 남학생이 보였다.

두꺼운 돋보기 안경을 끼고 더듬더듬 소리 내어 책을 읽다 고개를 든 진성이에게 기자가 물었다. “몇 학년이야?” “18살인데요, 학교를 꿇어서(유급해서) 중3이에요.” 진성이는 ‘비호치킨림프종’이라는 악성 림프종 질환을 앓고 있다고 했다. 기자가 책 읽는 것을 도왔다.

논술수업 봉사자인 한우리독서논술 강사 윤영미씨가 “진성이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독서량이 부족해 앞으로 책을 많이 읽힐 생각"이라고 말했다. 수업 시간이 되자 분홍색 모자가 잘 어울리는 새침한 소녀 선영이가 교실로 들어왔다. 소설 『화수분』에 대한 논술 수업이 시작됐다.

그때, 꼬마 하나가 문을 빠끔 열고 쏙 들어온다. 6살 현준이다. 아직 취학 전이지만 책을 좋아해 병원학교 단골 손님이다. 기자가 그림책 몇 권을 읽어주었다. 불자동차와 공룡, 책을 좋아하는 천진난만한 꼬맹이다. "뇌종양을 앓고 있어 방사선 치료 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활달했다

한쪽에서 현준이가 그림책을 읽느라 제법 시끄러웠지만 진성이와 선영이는 진지하게 논술 수업을 따라갔다. 어느덧 마칠 시간. 하지만 다음 만남을 기약할 수 없었다. 진성이는 집중치료에 들어가고 선영이는 요양을 위해 집으로 돌아간다. 윤 강사는 “언제 또 만날지 모르겠지만 그땐 다음 부분을 공부하자”며 수업을 마무리했다. 병원학교의 수업은 아이들의 건강상태에 따라 변동이 컸다. 공부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얼마나 어려울지 짐작이 갔다.

배움의 열망을 보다

이곳에선 현직교사·대학생의 자원봉사 활동 또는 관련 전공 학생들의 임상 실습으로 수업이 이뤄졌다. 미술 수업엔 한양대 대학원에서 응용미술과 예술치료교육을 전공하는 박윤미·이승희씨가 실습차 수업을 나왔다. 그림을 좋아하는 선영이가 다시 왔다. 자기 자신을 그려보라고 하자 선영이는 학교에 있을 때의 모습과 그렇지 않을 때의 모습 두 가지를 나눠 그렸다. 그림에 대해 설명하며 “학교에 가면 무척 재밌는데 얼른 가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냈다. 박씨는 “미술 활동을 하다 보면 학교에 대한 아이들의 열망을 자주 보게 된다”고 말했다.

다음은 음악 시간. 구의초등학교 이종희 교사가 4학년 서희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다. 마스크로 얼굴의 반을 가린 서희는 백혈병을 치료하느라 머리카락이 빠진 모습을 보여주기가 싫었는지 옷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써서 눈만 보였다. “미파솔미 레미파레도….” 처음 배우는 것치고 참 잘 한다는 이 교사의 칭찬에 서희의 눈이 웃었다. 간단한 동요 몇 곡을 연달아 친 서희가 “어렵다”고 푸념했다. 이 교사는 “연습하면 잘 할 수 있다”고 격려하며 네 개뿐인 손가락으로 피아니스트가 된 희야 이야기를 들려줬다. 서희는 선생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동요를 합창했다. “똑똑또독 빗방울 리듬 나와 함께 즐거운데~.”

이 교사는 “학교에 돌아가서 반 아이들에게 병원학교 이야기를 가끔 들려준다”며 “아프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또래 친구들의 이야기에 아이들도 큰 관심을 보인다”고 전했다.

수업은 끊기나 배움은 이어진다

서희는 성자초등학교 나수영 교사와 함께 국어 수업도 했다. 나 교사는 “매번 참여하는 아이들이 바뀌기 때문에 수업을 더 제대로 준비할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 어머니가 수업에 방해되지 않으려 살며시 들어왔다. 선우가 화상강의를 듣다 교실에 두고 간 노트북을 가지러 온 것이었다. 아이들은 병원학교 수업과 서울시교육청 ‘꿀맛무지개학교’ 사이트의 화상강의 수강 시간을 합쳐 출석일수를 인정받는다. 선우 어머니는 “병실에만 있으면 더 힘들고 지루한데 병원학교가 있으니 시간도 금방 가고 아이도 즐거워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솔직히 화상강의보다는 자원봉사자들이 해주는 개별 지도가 학습적으로는 더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미술치료 봉사팀이 과학의 날을 맞아 강아지 로봇 조립 수업을 준비했다. 재완이, 이슬이, 현준이, 형근이, 수연이가 모였다. 수업 중에는 간호사가 들어와 주사액을 갈아 끼우기도 하고 기계에서 삐삑 소리가 나자 전원을 연결시키려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아이들은 조각을 맞추고 끼우는 데 푹 빠져들었다. 그때 형근이가 갑자기 옆으로 픽 쓰러졌다. 얼른 일으켜 세우니 머리가 아프다며 탁자 위에 엎드려 괴로워했다. 결국 형근이는 조립을 완성하지 못하고 간호사의 부축을 받아 병실로 돌아갔다.

이 병원에 장기 입원했던 형근이는 지금은 부산에 있는 집에서 석 달에 한 번씩 검사를 받으러 온다. 형근이 어머니는 “아이가 초등 6학년 때 아프기 시작해 중1 입학을 세 번 했다”고 말했다. 수업 일수가 모자라 유급됐던 것이다. 이후 병원학교의 수업일수가 인정되면서 지금은 중3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됐다.

어느새 아이들이 각자 로봇을 완성했다. 서희는 “병실에 돌아가면 아픈 허벅지 주사를 맞아야 한다”며 표정이 어두웠다가 이내 밝아졌다. 엄마에게 보여 드릴 조립 로봇이 있어 신이 난 것이다. 수연이는 “피를 맞으러 가야 한다”고 했다. “수치가 잘 나오면 학교에도 갈 수 있댔어요.” 꿈이 의사라는 수연이가 씩씩하게 말했다. 문 밖에선 주사 맞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지만 병원학교 교실에서 아이들이 웃음을 되찾고 있었다.

글=최은혜 기자
사진=황정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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