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리셋과 백스페이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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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바로 이 자리에 어제 악마가 다녀갔습니다. 제가 서 있는 이 연단에는 아직까지도 유황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그는 마치 자신이 전 세계의 주인인 양 연설을 했습니다. 그의 연설을 이해하기에 정신과 의사가 여기 있었더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2006년 9월 20일, 지엄한 유엔 총회장이 발칵 뒤집혔다. 독설도 이런 독설이 있을까. 남의 나라 지도자를 ‘악의 축’으로 지목했던 정의의 사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지옥에서나 맡을 유황 냄새 풍기는 악마로 몰렸으니 얼마나 속이 뒤집혔을까.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말과 행보는 사사건건 부시 대통령의 속을 긁어댔다. 거듭된 경고를 묵살하고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을 찾아가 반미(反美)의 도원결의를 맺은 것이나, 이란의 핵개발 의혹을 옹호하며 안보리 회부 표결에 유일하게 반대표를 찍은 일쯤이야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생산량 세계 5위를 자랑하는 베네수엘라 석유의 대미 수출 판로를 끊겠다고 틈만 나면 위협하는 것이나 중남미 좌파 정권 도미노의 진원지가 되고 있다는 점에 비한다면.

반미로 호가 난 차베스에게도 스승이 있으니 바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다. 미국은 1992년 쿠바 민주화 법안을 통과시키고 봉쇄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옛 소련의 지원이 끊겼으니 쿠바도 오래 못 버틸 것이라 본 것이다. 식량줄은 물론 비료·농약까지 차단했다. 하지만 쿠바는 지렁이를 활용한 유기농법을 개발하며 버텼다. 석유를 죄니 차베스가 거저나 다름없는 헐값에 석유를 보내줬다. 부시 행정부는 ‘자유 쿠바 지원 미국위원회’를 발족시키고 반체제 운동을 지원했지만, 카스트로의 동생이자 혁명 동지인 라울이 물려받은 체제는 끄떡이 없다. 골리앗이 다윗을 당해내지 못하는 양상이 반세기 이상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취임 100일간 보여준 외교 행보가 눈부시다. 러시아와의 관계를 새로이 설정한다는 의미에서 이름 붙여진 ‘리셋(reset) 외교’가 수십 년 동안 앙앙불락했던 쿠바·이란·베네수엘라와의 화해 무드 조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대열에서 유독 빠진 나라가 북한이다. 차베스처럼 오바마와 악수를 하기는커녕, 미사일을 쏘고 핵물질 재처리로 미국을 몰아붙이는 악수(惡手)만 두고 있는 탓이다. 10년, 20년째 옛 수법을 우려먹고 있는 것이다. 북·미 관계 개선을 원하는 북한이야말로 리셋 단추를 눌러도 모자랄 판인데, 왜 엉뚱하게도 백스페이스(backspace) 키만 하염없이 누르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