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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군정체제 아래 일본의 경제개혁…재벌 해체로 군사력기반 와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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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한국은 지금 국제통화기금 (IMF) 체제극복의 '새로운 혼 (魂)' 을 찾아 나서고 있다.

그래서 요즈음은 중남미국가의 경험에서 지혜를 찾기에 바쁘다.

그러나 가까운 이웃에도 한국의 위기극복에 '참고서' 로 쓸만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2차대전후 美군정하의 일본이 그것이다.

외부에서 개혁이 강요되고, 또 그 개혁과제들이 사실상 '경제개조' 를 의미하는 강도높은 것이라는 점에서 당시의 일본과 오늘의 한국간에는 역사.사회적 유사점이 많다.

50년전 美군정하의 일본 경제개혁이 IMF체제하의 오늘날 한국경제에 던지는 교훈은 무엇일까.

2차대전으로 미국은 명실공히 '세계의 패권자' 로 등장했다.

종전후 일본을 점령.관리했던 연합군총사령부 (GHQ) 의 정책은 곧 미국의 정책이었다.

그래서 미군정의 일본관리정책은 당시 미국의 '세계경영' 의 일부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미국은 2차대전 종결부터 구체적인 '일본개조구상' 을 가지고 있었다.

1942년부터 국무성은 '전후정책위원회' 를 통해 기본골격을 마련하고, 1944년 12월 美국무.육군.해군 3省조정위원회 (SWNCC) 의 정책문서로 확정시켜, 포츠담회담에서의 전후처리협상에도 기본맥락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 핵심은 일본의 비군사화와 민주화였다.

경제개혁도 그 기본구상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맥아더원수를 정점으로 하는 GHQ가 일본에 요구한 것은 재벌해체와 경제력집중완화, 농지개혁, 그리고 노동권보호다.

일본이 근대산업국가로 등장한 이후 2차대전에서 패할때까지 일본경제를 지탱해 온 세기둥을 송두리째 뽑으라는 주문이었다.

미국은 2차대전이 격심했던 원인을 일본의 군국주의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 군국주의를 군벌과 재벌간의 밀착, 근로자의 탄압, 사실상의 농노관계인 지주.소작제도가 뒷받침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 재벌해체와 집중배제 = 재벌은 일본군국주의의 지지기반이자,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아시아 경제침략의 주역이었다.

이런 점에서 GHQ의 재벌해체요구는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을 방문한 코윈 美국무성조사단장은 "재벌해체는 미국이나 일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다.

일본의 군사력을 심리적으로 또 제도적으로 파괴하기 위해서다" 고 재벌해체의 목적을 분명히 했다.

일본 국내에서도 재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강했지만, 패전국 입장에서는 재벌해체에 따른 경제기반붕괴에 대해 아무런 불평도 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GHQ에 의한 재벌해체작업은 지주회사의 해체, 재벌가족의 기업지배력배제, 그리고 주식소유의 분산화 등 세가지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물론 재벌들도 어떻케든 해체는 면하려고 평화산업으로의 전환, 기업분할 등 자체방안을 마련하고, 직간접으로 GHQ와 협의를 꾀했다.

그러나 재벌의 완전해체에 관한한 GHQ가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야스다 등 4大재벌대표를 대장성에 불러 '자발적해체' 를 선언토록 했다.

GHQ의 또다른 대기업정책은 경제력집중해소였다.

그 수단은 강력한 독과점금지제도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1945년 GHQ각서는 일본정부에 대해 독과점금지법 마련을 지시했다.

정부는 46년 여름에 GHQ反트러스트.카르텔과 (課)에서 준비한 시안을 기초로 해 다음해 12월에 '과도경제력집중배제법' (독금법) 을 마련했다.

그해 여름 원안이 공표되었을때 경제단체를 필두로 "일본경제를 파괴로 이끌고 있다" 며 극심한 반대론이 펼쳐졌다.

심지어 미국에서조차 이 독금법이 너무 심하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48년 2월에 지정했던 325개의 경제력집중지정회사는 결국 7월 최종결성시에는 100개로 축소조정되고 말았다.

GHQ의 재벌규제정책의 한구퉁이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대기업규제가 완화되기 시작한데는 이때부터 격화되기 시작한 미.소간의 냉전이 크게 한몫을 했다.

미국으로서는 일본을 '적 (敵) 이 아닌 반공 (反共) 의 보루 (堡壘)' 로 키워야 할 필요가 발생한 것이다.

경제단체연합회는 1948년 독금법 1차개정에 만족치 않고, 정부에 대해 끈질기게 개정의견을 개진하면서 시간을 벌었다.

1951년9월 연합국의 대일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개선된 대일정책분위기에 편승, 결국 53년9월 제2차독금법 개정으로 독과점규제의 대폭완화를 이끌어 냈다.

이 개정법은 카르텔은 물론 재벌소유형태의 독점기업을 합법적으로 재건하는 길을 터놓았다.

◇ 농지개혁 = 농지개혁은 GHQ가 추진하기 전에 일본정부가 선수를 쳤다.

농지개혁을 일본정부가 주도했다는 점에서 재벌해체나 노동개혁과 차이가 있다.

'자작농 (自作農) 주의' 에 강한 집착을 가졌던 전후 초기내각의 마쓰무라농무상이 그 주역이었다.

그가 마련한 농정개혁원안은 지주적토지소유를 근간으로 하던 과거의 농지제도에서 탈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소작료의 금납제. '자작농창설' 의 강화를 골짜로 한 그의 농정개혁안은 GHQ의 개정요구때문에 시행해 보지도 못했다. 당초 GHQ가 생각했던 소작제폐지안은 "일본의 소작지 전부를 정부가 수용해서 소작농의 완전한 소유로 한다" 는 것이었다.

그래서 2차개혁안은 지주의 보유한도축소, 소작지의 국가강제매수, 개혁실시기간의 단축, 소작인보호 등을 골자로 짠 것이었다.

그런데 1946년부터 미.소간에 틈새가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극단적인 개혁조치를 피할 수 있었다.

또 농지를 잃게된 지주농민들 뿐아니라, 극심한 식량난때문에 도시근로자들이 1946년5월에는 '식량메이데이' 로 불리우는 시위에 나서는 등 농지개혁법 개정의 압력이 높아만 갔다.

농지개혁법의 개정은 완전히 GHQ주도하에서 이뤄졌다.

같은해 6월의 GHQ안을 근간으로 만들어진 일본정부안은 10월에 아무런 수정없이 국회를 통과했다.

◇ 노동개혁 = 미군정초기의 노동정책은 공무원을 포함한 모든 근로자에게▶단결권▶쟁의권▶단체교섭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되, 사용자에게는 그 대항조치로써 직장패쇄권을 주는 등 근대적 노사관계의 육성에 기조를 뒀다.

GHQ의 지시에 의해 1945년에 노동법제심의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가 심의한 노동조합법의 내용을 GHQ가 수정하고, 이를 국회가 무수정통과시키는 식으로 노동개혁이 추진되었다.

그런데 舊지배층이었던 재계 뿐 아니라 노동조합들이 GHQ의 노동개혁추진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야릇한 일이 벌어졌다.

노조활동이 GHQ의 생각을 훨씬 넘을 정도로 급진적인 좌경화 양상을 띄었던 것이다.

'진보적' 이었던 GHQ도, 일본 '경제의 민주화' 를 위해서 근로자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방식의 '산업평화' 를 유지하는 한계안에서 추진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어 갔다.

드디어 1946년 맥아더원수가 '暴民데모불허' 성명을 내기에 이르렀고, 원래 군국주의자.무정부주의자 등에 적용하려던 '점령목적에 위배되는 파업금지' 조항도 '2.1총파업 (總罷業)' 을 계기로 노조활동에 적용되게 되었다.

어쨌든 노동조합법이 제정되는 동안 크고작은 노사분규가 발생, 쟁의를 예방하고 쟁의발생시 이를 신속하게 처리하는데 적합한 법률의 제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노동관계조정법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정부와 GHQ가 이견을 보였던 것중에, 행정관청에 의한 쟁의조정은 反민주적이라는 이유로 삭제되었고, 공익사업장에서의 쟁의행위제한일수를 단축했다.

또 공무원의 쟁의행위제한을 완화하는 등 당초 일본측이 마련한 노동관계법제는 GHQ에 의해 대폭수정되었다.

김정수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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