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IMF 합의배경…재정 응급조치 돈줄에 숨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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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부와 IMF의 이번 합의는 긴축을 완화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특히 IMF가 자금지원에 나설 때 금과옥조로 여겨왔던 재정흑자를 포기하고 재정적자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주목된다.

우리 정부는 IMF의 요구로 어쩔수 없이 받아들인 초긴축정책이 흑자기업을 도산시키는 등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이번 합의는 IMF 스스로도 세계 11위의 무역대국인 한국에 개발도상국식 처방이 적절치 않다는 점을 인정한 셈이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아무튼 정부는 이번 합의가 최악의 자금경색 상황을 벗어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가장 주목되는 조치는 재정적자 용인이다.

당초 정부와 IMF는 올 세출을 깎고 세수를 늘려서라도 재정을 균형 내지 소폭 흑자로 유지하기로 합의했었다.

그러나 워낙 재정에서 돈 들어갈 곳이 많고, 세금은 안걷히게 돼 있어 재정적자가 불가피하다는데 인식을 같이했다.

재정적자를 용인키로 함에 따라 정부가 세출예산을 줄여 짤 때 다소간의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부실금융기관 인수.합병 (M&A) 이나 부실채권 정리, 고용보험 재원 마련 등이 모두 국채발행 등 재정을 통해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최근에는 외국 민간금융기관들이 외채 만기상환의 조건으로 정부 국채와 맞교환할 것을 요구하고 있어 이래저래 현 위기국면 타개를 위한 재정 동원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선진국들도 그동안 경기부양 등 각종 목적으로 재정적자를 감수해 왔으며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회원국중 건전재정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한국이 유일할 정도다.

재정적자 폭을 어느 정도로 할지는 정부와 IMF가 2월 중순 추가 협상하기로 했다.

재정경제원 관계자는 "일반회계보다 고용보험기금 등 기금에서 적자가 많이 발생할 것" 이라며 "IMF는 통상 기금을 포함한 통합재정수지 적자가 국민총생산 (GNP) 의 2%이하면 건전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고 말했다.

GNP (올해 약4백조원 안팎) 의 2%는 약8조원이다.

영국의 재정적자는 6.5%, 프랑스는 5.5%, 미국은 2.2%, 일본은 1.6%에 달한다.

그러나 재정적자를 우려하는 시각도 적지않다.

일단 재정적자가 본격 시작되면 흑자로 돌아서기가 매우 어려운데다 적자가 점점 확대될 경우 재정인플레를 야기하고 궁극적으로는 경제성장을 막는 부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들이 대부분 이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재정적자 용인 외에 통화증가율을 상향 조정한 것도 자금난을 덜어주기 위한 조치다.

오는 3월말 총유동성증가율 (기준) 을 13~14%로 조정할 경우 1분기중 최고 14조원의 통화공급이 예상된다.

이는 지난해 1분기의 20조원에 비해 낮은 규모다.

그러나 IMF는 증가율을 연말기준 9%로 요구했었고 만약 이 수치가 1분기에도 적용됐을 경우 1분기중 18조원을 거둬들여야 하는 엄청난 자금경색을 맞을뻔 했다.

재정을 동원하고 통화공급이 늘어남에 따라 금리도 다소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금리안정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말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긴축의 고삐를 다소 늦춤에 따라 물가는 더 불안해질 것으로 보인다.

정부와 IMF도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9%로 높여잡았다.

양측은 내부적으로는 두자릿수 물가상승 가능성도 다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경제성장률도 1~2%로 낮췄는데, 이로써 정부도 올해 1백만명대 대량실업 시대를 공식 인정한 셈이 됐다.

정부와 IMF도 고물가와 고실업은 피할 수 없는 대세로 보고 있는 것이다.

고현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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