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거부한 여성주의 문화모임 '마녀' 독립선언

중앙일보

입력 1998.0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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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온통 우중충하기만 했던 지난해 12월20일 늦은 6시. 신촌의 여성전용 카페 '라브리스' 에는 난데없는 제삿상 - .사과.건어물에 향과 촛대뿐인 단출한 차림이지만 분위기는 여느 제사처럼 엄숙하다.

그러나 그와는 안맞게시리 제삿상 주위엔 파자마.슬립등 속옷 차림의 여인들이 뭘 하자는 걸까. 여성주의 문화모임 '마녀' 의 퍼포먼스 'seX - Mas' 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 자리에 초대된 사람은 '참함' 에 질린 못된 여성들이다.

이름하여 천사가 아닌 마녀들. 남성적 시각에서 보면 온갖 사악함을 지닌 여자들인 셈인데 이들이 생각은 좀 다르다.

창조적이고 모든 억압에 반대하며 주체성을 가진 이가 바로 마녀라는 것. 남성 위주의 사고 틀을 깨뜨리자는 거다.

파자마를 입고 성 (性) 을 이야기하는 이유도 거기에서 나온다.

침실이라는 개인적 공간의 문제를 공개해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표출하는 상징적 이미지로 속옷을 등장시킨 것이다.

제사는 계속된다.

'마녀' 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죽어간 여인들과 여신들을 기리는 제문을 읽는다.

사포.잔 다르크에 이어 정신대 할머니의 이름도 들린다.

남편의 폭력에 희생된 수많은 아내들, 단지 딸이라는 이유로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하고 낙태로 죽어간 딸들의 원혼을 달래는 것도 빠뜨릴 수 없다.

한쪽 구석에선 냄비가 끓고 있다.

“이것은 돼지 비계와 김치 '꼬다리' 등 우리 어머니들이 즐겨 드시던 음식들을 넣어 만든 국이거든요. 이 국을 드시고 간절히 소원을 빌면 모두 이뤄질거예요. ” 처음엔 머뭇머뭇 테이블에 앉아만 있던 여성들이 하나 둘씩 나와 소원을 빈다.

“이 땅의 직장여성들이 저임금이나 승진기회 박탈등의 차별을 당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 여성의 몸을 그리는 사생대회, 안전한 섹스 강연, 마녀 모형과 사진찍기 등에 이어 남성들의 횡포에 단호히 맞서겠다는 의미로 콘돔을 불어 터뜨린다.

아, 그리고 끝맺음의 댄스파티 - . 95년 AIDS를 다룬 연극 '얼굴없는 자궁' , 96년 낙태.동성애를 주제로 한 연극 '코인 라커' 에 이어 지난해 11월 소식지 '마녀' 창간과 같이 한 퍼포먼스 '나는 여성이다' 와 seX - Mas까지 '마녀' 의 행사는 이번이 네번째다.

그 취지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교과서.세미나 같은 것 말고 즐기면서 여성학을 하자는 것이다.

이론 위주의 여성학은 여성문제를 간접적으로 받아들이게 할 뿐이지 결국 자기 이야기라는 것은 깨달을 수 없게 하는 한계를 지닌다.

“우린 '더디 가도 함께 간다' 는 말을 믿지 않아요. 남자들을 바꾸기 위한 에너지를 차라리 여성에게로 돌려 여성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여러 문제들을 공유하고 새로운 여성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운동단체 '참누리' 에서 만나 소식지 '마녀' 편집진으로 만난 김현진.그레이스.지요.리나.뿌리씨의 한결같은 말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마녀는 끊임없이 수난을 당해왔다.

새로운 여성문화를 만들어 내는 이들 '마녀' 에게만은 '남성 위주의 사회' 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마녀재판' 이나 '마녀사냥' 이 제발 일어나지 않기를. 올핸 정말 그렇게 되길 비나이다.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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