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볼테면 해보든지" 국정원 내심 불쾌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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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이 1987년 KAL기 폭파 사건에 대한 정치권 일각의 재조사 요구를 수용할 용의가 있다고 밝혀 재조사가 이뤄질지 주목된다. 열린우리당 일부 의원들은 최근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대상을 확대하는 방향의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 개정을 추진해 왔다.

이 법에서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의문의 죽음'으로 국한한 의문사위 조사대상을 '국가공권력의 부당한 행사로 인해 사망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죽음'으로까지 확대해 KAL기 사건 재조사의 길을 열겠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 천정배 원내대표도 4일 기자간담회에서 "KAL기 폭파 사고와 군 의문사, 납북어부 문제 등도 국가가 조사해야 한다"며 여당 의원들의 법 개정 움직임에 힘을 실어줬다. 한나라당의 경우 이미 원희룡 의원이 의문사 진상규명 대상을 확대하는 내용의 법안을 제출한 상태여서 국회에서의 논의가 본격화할 전망이다.

그러나 원 의원은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 KAL기 사건을 공권력에 의한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만큼 그 사건이 진상규명 대상이 된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해 이들 법안심사 과정에서 논란이 예상된다.

KAL기 사건에 대해선 그동안 유가족을 중심으로 많은 의혹이 제기돼 왔다. 사건 후 전두환 정부는 "김정일의 사주를 받은 김현희가 88 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한 등의 목적에서 KAL기를 폭파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유가족 측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33가지에 달하는 의혹을 제기하며 재조사를 촉구해 왔다. ▶김현희의 진술 외에 구체적인 물증이 드러나지 않은 점▶블랙박스가 발견되지 않은 점 등이 주된 의혹이다. 유가족들은 지난 1일엔 국회도서관에서 진상규명토론회를 여는 등 재조사를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그러나 국정원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런 국정원이 4일 방침을 확 바꿨다. 여당 원내대표가 재조사의 필요성을 강조하자 국정원은 즉각 긴급대책회의를 열어 "국회의 재조사 요구에 응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정면대응을 하겠다는 것이다. 재조사가 이뤄지더라도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엔 불쾌감이 배어 있다. "해볼 테면 해보자는 것이 국정원의 분위기"라는 등의 얘기가 관계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움직임과 무관하게 이 사건이 의문사위의 손에 다시 맡겨지게 되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사건의 진상과는 상관 없는 의혹과 논란의 증폭으로 국민이 이념 대립의 소용돌이에 빠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당 원내대표가 재조사 주장을 했을 때 이런 점까지 염두에 뒀는지 의문이다. 북한은 KAL기 사건 이후 테러지원국으로 지목됐다. 천정배 원내대표가 이 사건의 재조사를 요구하는 것이 과연 '일반 상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통할지 미지수다.

김정욱 기자

◇대한항공 858기 사건=19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기(기장 김직한, 당시 58세)가 인도양 상공에서 공중 폭발했다. 중동 근로자가 대부분인 한국인 승객 93명과 외국인 2명, 승무원 20명 등 115명이 숨졌다. 수사당국은 북한 김정일의 친필 공작지령을 받은 김현희(당시 26세)와 김승일(당시 70세)이 범인이라고 밝혔다. 이들이 중간 기착지에 내리면서 기내 좌석 선반에 폭발물을 놓았다는 것이다. 김승일은 도주 과정에서 위조여권이 적발되자 음독자살했다. 체포된 김현희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90년 4월 대통령특사로 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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