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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익 교수가 열어본 21세기 다윈의 서재(6): 스티븐 제이 굴드의 『풀하우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11호 10면

아침 산책을 다녀온 다윈이 서재에서 e-메일 한 통을 읽고 있다. “선생님, 요즘 광고 카피를 보면 ‘진화’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해요. ‘자동차의 진화’ ‘휴대전화의 진화’ ‘스포츠의 진화’ ‘변화를 넘어선 진화’…물론 여기서 ‘진화’는 좋게 향상되었다는 뜻이겠죠? 그런데 ‘진화’를 이렇게 ‘진보’와 동일한 개념으로 막 써도 되는 건가요? 선생님께 꼭 여쭤 보고 싶었어요. 런던의 한 시민 올림” 여느 때처럼 답장을 써 내려갔지만, 뭐가 좀 안 풀렸는지 하버드대의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쓴 『풀하우스』를 꺼내 든다. 다윈은 굴드의 이 책이 ‘진화와 진보의 관계’에 관한 최고의 책이라 생각해 왔다. 다윈이 전화기를 든다.

다윈=여보세요? 날세. 그동안 잘 지냈나?

굴드=네, 선생님. 웬일로 일요일 이른 아침에 전화를 다 주세요?

다윈=한 독자가 진화와 진보의 관계를 물어봤는데 답장을 하다가 좀 막혔네. 자네의 『풀하우스』를 다시 보려다가 눈도 침침하고 해서 전화로 직접 물어보려고. 잠을 깨웠다면 미안하이.

굴드=아니에요. 저도 지금 센트럴파크에서 산책하고 막 들어왔어요.

다윈=음. 요즘 광고에 ‘진화’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카피가 많잖아. 그렇게 막 써도 되는 거냐는 질문이었어. 진화에는 방향이나 트렌드라는 게 없는 것 아니냐는 거지. 자네의 『풀하우스』가 바로 그 문제를 천착한 책 아닌가?

굴드=네, 맞습니다. 저는 거기서 “진화는 진보가 아니며 다양성의 증가일 뿐”이라고 했죠. 생명이 어떤 트렌드나 방향을 가지고 진화해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데요, 그것은 진화적 변화의 특징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

다윈=나도 자네의 말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네. 흔히 동물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하등’이니 ‘고등’이니 하는 형용사를 갖다 붙이곤 하는데, 나는 이게 잘못된 언어 습관이라고 보거든. 현재 존재하는 모든 종은 다 나름대로 자신의 환경에서 그럭저럭 적응하고 사는 놈들 아닌가? 동물원의 침팬지가 우리보다 ‘하등’하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이 우리에겐 있겠지만, 그들과 우리가 600만 년 전쯤에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사촌지간이라는 사실을 알면 민망해질걸.

굴드=자연계에서 우리는 절대 최고가 아니에요. 사실, 생명의 역사에서 절반 이상은 박테리아(세균)의 독무대였죠. 물리ㆍ화학적으로 가장 단순한 구조를 가진 생명체로서 35억 년 전에 처음 생겨난 이후부터 줄곧 가장 강한 생활력을 보여 왔어요. 양도 제일 많고요. 지금도 박테리아는 심해의 끓는 물속이나 우리 위장 안에서도 잘 살아요. 인간은 도저히 살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박테리아는 번성할 수 있어요. 아마 외계 생물학자는 지구가 인간이나 개미가 아닌 박테리아의 지배를 받는 행성이라고 보고할 겁니다.

다윈=그렇다면 자네는 35억 년 전이나 지금이나 생명의 진화에 별다른 게 없다는 얘긴가? 그건 좀 너무 과하지 않아? 박테리아로만 우글거렸을 생명의 초창기와 벚나무·개미·코끼리·사람 등 온갖 종류의 생물체로 가득한 지금이 같다고 볼 수 없지.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다양해지고 복잡해졌다는 점을 부인하긴 좀 힘들 것 같은데.

굴드=물론, 선생님 말씀대로 예전보다 생명이 더 다양해진 건 맞아요. 그런데 다양성이 증가한 것을 가지고 마치 생명 진화에 트렌드가 있는 것처럼 결론을 내리는 것이 잘못이라는 얘기죠. 한번 생명이 생겨나면 더 다양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단순한 생명체, 박테리아에서 시작했으니까요. 바닥을 친 주가는 상승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이런 광경을 떠올려 보세요. 한 취객이 비틀거리면서 술집 문을 나섭니다. 그가 인도를 따라 오른쪽으로 가다 보면 도랑이 있고, 그 도랑에 빠지면 이야기는 끝입니다. 만일 술집 문을 나선 취객이 아무렇게나 비틀거리면서 이동한다고 해 봐요. 단, 술집 쪽이나 도랑 쪽으로만 비틀거릴 수 있어요. 그 취객은 결국 어떻게 될까요?

다윈=글쎄. 말로만 설명하니까 상상이 잘 안 되긴 하는데, 언젠가는 도랑에 빠지지 않을까?

굴드=맞아요. 취객이 비틀거리다 술집 벽에 부딪치면 다시 도랑 쪽으로 비틀거리게 될 테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 결국 도랑에 빠지고 마는 거죠. 취객은 그저 아무렇게나 비틀거렸을 뿐인데 말이에요. 그가 도랑 쪽을 향해 간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술집이라는 왼쪽 벽이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윈=옳거니. 그러니까 생명의 진화가 복잡성을 증가시키는 쪽으로 진행된 듯이 보이지만 이는 왼쪽 벽에 박테리아와 같이 가장 간단한 생명체가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구먼.

굴드=역시 선생님이세요. 취객이 도랑을 ‘향해’ 이동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명이 더 높은 복잡성을 ‘향해’ 변화했다고 말할 수 없지요. 생명은 우리 인간처럼 복잡한 종의 탄생을 ‘향해’ 달려온 게 아닙니다. 그저 다양하고 복잡한 종들이 생겨난 것일 뿐 생명의 진화가 다양성과 복잡성의 트렌드를 보인다고는 할 수 없어요.

다윈=맞아. 박쥐가 어두운 동굴에 살기 시작하면서 복잡한 시각 장치를 퇴화시킨 것을 보면 복잡성을 향해 진화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 수천만 년 동안 천하를 호령하던 공룡이 멸종한 사건을 보라고. 소행성 하나가 떨어져 지구 환경이 급변하니까 기존의 트렌드가 완전히 뒤집혔지.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진화와 진보를 자꾸 혼동할까?

굴드=‘진보’라는 것이 우리 사회의 최고 가치 중 하나이기 때문 아닐까요. 생명계의 ‘몸통’은 박테리아고 우리는 겨우 ‘깃털’에 불과한데, 깃털이 자꾸 주인 행세를 하는 형국이죠. 저처럼 ‘박테리아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은 인기가 없어요.

다윈=‘몸통’은 항상 배후 세력 아닌가? 하하. 일요일인데도 아침 일찍 전화받아 줘서 고맙네.

※도킨스와 함께 현대 진화론의 양대 산맥을 형성했던 굴드는 2002년(61세) 암으로 사망했다.


KAIST 졸. 서울대에서 진화론의 역사와 철학 연구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덕여대에서 자연과 인문의 공생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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