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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해낸다]5.'글로벌 룰' 체질화 하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한보 부도 4개월 전인 96년 9월. 주거래 은행측은 전문기관에 이 그룹의 신용도 평가를 의뢰했다.

재무구조.담보능력 등을 종합 평가한 신용점수는 대출심사 적격기준 60점에 한참 미달되는 41점. 그러나 은행은 이 평가를 무시한 채 추가로 2천억원을 지원했다.

검찰수사 결과 이는 한보측 로비와 정치권 청탁 때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 경제를 멍들게 한 부실 대출관행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IMF체제 극복은 단순히 경제구조 개혁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현재의 난국은 우리 사회를 움직여온 시스템의 모순과 그 부작용이 누적된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따라서 부도위기까지 몰렸던 국가를 재건하는 과정은 사회 전체의 총체적 체질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그 작업은 한마디로 우리 사회에 보편적 가치와 규범을 복원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IMF 프로그램은 우리에게 고통과 함께 그같은 개혁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것은 '한국방식' 을 버리고 '글로벌 룰' 을 체질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구촌 어디에서나 적용되는 '글로벌 룰' 은 투명성이 특징이다.

정부 정책결정이나 기업 경영활동이 투명하지 않고서는 무너진 한국경제의 신용이나 경쟁력을 되살릴 수가 없어진 세상이다.

최근 외환위기때 외국인들이 썰물처럼 한국경제를 떠나간 것도 "도대체 한국기업의 회계장부와 정부의 정책을 믿을 수 없다" 는 불신감이 결정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미셸 캉드쉬 IMF총재는 얼마전 " '이웃의 문제' 가 곧 '내 문제' 로 파급되는 글로벌화된 세계에서 자기를 보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투명해지는 것" 이라고까지 말했다.

투명한 사회에선 뇌물이나 부패 관행이 살아남을 수 없다.

특정지역 출신이라고 해서, 국적이 다르다고 해서, 피부색이 틀리다고 해서 차별할 수도 없게 된다.

우리나라에도 이같은 기운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IMF와 외국투자가들이 우리에게 맨 먼저 내건 요구사항도 각종 정보와 기준을 투명하게 공개하라는 것이었다.

지난 연말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가 채택한 '부패방지협약' 이나 오는 4월 타결될 '다자간투자협정 (MAI)' 도 이같은 흐름을 더욱 가속화할 전망이다.

당장 부패방지협약이 올해 안에 발효되면 외국 공무원들에게 적당히 뇌물을 쥐어주고 공사를 따내거나 이권을 챙길 수 없게 된다.

뇌물을 준 사람이 형사처벌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애써 거둔 사업수익도 몰수된다.

2중장부를 만들거나, 부채를 늘려잡는 기업도 처벌을 피할 수 없다.

비자금 조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는 얘기다.

부패방지협약이 해외경영을 투명하게 하라는 것이라면 MAI는 국내시장에서 내외국인간 차별을 두지 않겠다는 국제적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국내에 진출한 외국 금융기관이 국내 금융기관에 비해 차별을 받은 경우 소송을 통해 해당정부로부터 손해를 보상받을 수 있다.

학연.지연을 따지거나 뇌물의 크기로 누구를 봐주고 특혜를 줘온 '한국 방식' 대신 공정한 '게임의 룰' 을 정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지난 수십년동안 고속 압축성장이라는 목표지상주의에 빠져 공정한 게임의 룰을 상실한 채 지내왔다.

원칙보다 정실 (情實) 이 앞서고 편법.탈법이 판을 쳤다.

법정관리.화의사건을 전담하는 서울지법 민사합의50부 오석준 (吳碩峻) 판사는 "현재의 경제위기는 법과 규정을 규제로 잘못 이해하고 잘 안지키는 우리 기업문화 영향도 있다.

부실기업들의 경우 규정을 무시한 회계처리 등으로 채권은행과 투자자를 속이는 잘못된 경영행태가 자주 발견된다" 고 지적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IMF시대에 '한국 방식' 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다시 일어서기 위해선 상식과 원칙이 통하고 공정한 게임의 룰이 살아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예영준.김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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