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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e칼럼

리얼 야생 버라이어티 덴마크 코펜하겐GC

중앙일보

입력

유럽 여행을 여러 차례 왔었지만 스칸디나비아 반도 쪽으로 갈 기회는 없었다. 아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언어도 모르고 물가도 비싸고 유럽 문화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로마 문명과도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킹의 원조나 새로운 국가사회주의 혹은 복지국가 모델에 대해 큰 관심이 없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교통편 마저 녹록치 않았다. 유럽 대륙과 육로로 연결이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독일 북쪽 끝과 간신히 잘록하게 맞닿아 있을 뿐이다. 이번에는 차편도 있고 해서 작정하고 넘어가 보기로 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무려 800Km를 달려야 했다. 속이 다 후련한 독일 아우토반을 거쳐 드디어 유틀란드반도에 입성, 수도 코펜하겐을 지나 20km를 더 북진한 끝에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오래된 골프장 Kobenhavns GC (Royal Copenhagen GC)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네비게이션은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일찌감치 알리고 있었으나 좀처럼 골프장의 실체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기웃거려 보아도 쇠사슬로 굳게 걸린 큰 대문과 그 안으로 깊은 숲 속 오솔길만 보일 뿐이었다. 골프장의 이름을 확인할 방법도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한참을 서성이다 포기하고 돌아서려던 차에 등산복 차림의 아저씨가 쪽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골프장 클럽하우스에 가려면 이 곳에 차를 세우고 족히 1~2km는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차에서 옷과 신발을 갈아 신고 캐디백을 매고 완전군장을 마친 후 길을 나섰다.

대문을 지나 빽빽한 나무숲이 만들어낸 터널 속 오솔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숲이 깊어서인지 새벽 안개가 아직 가시지 않고 옷에 닿아 기분 좋은 습도를 만들어냈다. 코 끝에 청량한 공기가 스쳤고 저 멀리 터널 끝에서 보이기 시작한 빛에 우리의 기대감이 점점 커졌다. ‘도대체 어떤 코스가 펼쳐지려고 이토록 인트로가 길단 말인가?’

옛날 사립문을 연상시키는 나무 울타리 안에 낮은 클럽하우스가 보일락 말락 자리잡고 있었다. 건물 내부는 간소한 초등학교 분위기였다. 군더더기 없이 딱 있을 것만 있는… 하물며 그린피를 받는 곳도 없었다. 복도 구석진 곳에 ‘그린피’라고 작게 쓰여진 박스가 서 있었다. 박스 위엔 사람들이 자필로 쓴 장부가 하나 보이고, 벽에 봉투가 꽂혀 있긴 했지만 죄다 덴마크어로 되어 있어 해석이 불가능했다.

‘신문 무인 판매대처럼 알아서 돈을 내고 골프를 치라는 건가? 설마 아니겠지. 그린피가 한 두 푼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매니저를 수소문하여 그린피를 어떻게 내야 하냐고 물었더니 역시나 무인 계산대로 우리를 안내하더니 장부에 티오프 시간과 이름을 적고 봉투에 돈을 넣어 상자에 넣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거 아주 위험한 시스템아닌가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매니저를 바라보았다. 그는 웃으며 양손을 벌리고 어깨를 한 번 추켜세우는 그네들 특유의 제스쳐를 취할 뿐이었다. 후에 알고 보니 덴마크 대부분의 스포츠 시설은 국가 소유이기에 국민 복지 차원에서 거의 무료에 가깝게 운영을 하고 있다고 한다. 골프장 역시 체육 시설이고 사용자 차원에서 보면 몇 푼 안 되는 그린피에 양심을 팔 이유가 없고, 운영자 측면에서는 몇 푼 안 되는 그린피에 인건비를 낭비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코펜하겐 골프클럽(Kobenhavns GC) 혹은 로열 코펜하겐 골프클럽(Royal Copenhagen GC)은 1898년 오픈했다. 부지는 1669년 국왕 프레드릭 3세가 사슴 사냥터로 일군 땅이라고 했다. 골프장이 위치하고 있는 Dyrehaven이라는 지명 역시 덴마크어로 ‘사슴 정원’이라는 뜻이라고. 지금도 덴마크 국왕 내외를 비롯한 왕자 공주들이 이 골프장 멤버이며 코스 가운데에는 왕가의 멤버들이 골프 휴가 시 기거하는 궁전이 있다고. 물론 그 때 뿌려놓은 사슴들 역시 대를 이어 생존하며 2,000마리 이상이 (자신들도 추정할 뿐이라고) 무리 지어 다니고 있단다.

“아… 영국에도 있었어요. 런던의 햄튼코트 팰리스 골프장이 왕가의 사슴 사냥터를 골프장으로 만들어서 사슴들이 많이 뛰어 놀고 있었어요.” 사실 골프장에서의 사슴은 우리에게 그리 새로울 것이 없는 아이템이었다. 영국 뿐 아니라 도처에서 사슴을 풀어 놓은 코스를 만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랐다. 지금까지 만났던 사슴들은 말 그대로 장난이었다. 코펜하겐 GC 사슴들과 비교하면 그 놈들은 온실 속 화초에 불과했다. 귀여운 흰색 꼬리에 등과 엉덩이엔 흰색 땡땡이를 박고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눈빛을 한 그 귀여운 꽃사슴은 그 곳에 없었다. 이 곳의 사슴들은 들판의 잡초 그야말로 ‘리얼 야생 버라이어티’였다. 페어웨이는 물론이고 그린까지 자유롭게 넘나드는 녀석들의 사이즈는 황소보다 컸고, 뿔은 공포스러웠다. 한 두 마리 떼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 수 십, 수 백 마리가 무리를 지어 다녔다. 그린에서 퍼팅을 하려는데 어디선가 지축을 흔드는 말발굽 소리가 나서 뒤돌아 보니 뽀얗게 흙먼지를 피우며 떼지어 이동하는 수 백 마리의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혹시 우리 쪽을 덮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멈칫했을 정도였다. 그랬다. 순록이었다. 산타클로스의 썰매를 끌었던 순록이었다.

사슴이 뛰어 노는 골프장에선 늘 걱정이 앞서곤 했다. 행여나 내 공에 녀석들이 맞고 쓰러지면 어쩌나, 몸 값이 상당한 녀석들일텐데… 하지만 이 곳에선 다른 걱정을 했다. 녀석들이 내 공에 맞고 화가 나서 우리에게 덤비면 어쩌나, 힘이 상당한 녀석들일텐데….
게다가 9~10월이면 녀석들이 짝짓기를 하는 시즌이라 암컷을 놓고 벌이는 숫사슴들의 싸움으로 여기저기 피를 묻힌 사슴들도 보이고 신경도 예민하다지 않는가. 행운의 상징이라는 흰 사슴을 발견하고 좋아라 했는데 몇 홀을 지나고 어디서 피투성이가 되어 나타난 녀석을 다시 만났다. 그런데 피투성이가 된 뿔을 나무 등걸에 부딪히며 씩씩대면서 우리를 째려보는 것이 아닌가. 종로에서 뺨 맞고 우리에게 화풀이를…. 다 좋은데 가까이 오지만 말아라….

워낙 순록에 압도 되다보니 코스에 대한 기억은 오히려 가물가물. 코스는 전반적으로 평탄하고 쉬운 편이었다. 블라인드 홀이나 벙커, 해저드의 압박도 크지 않았고, 똑바로 곧은 홀들이 대부분이었고 시야가 트여 스코어 내기는 좋은 코스였다. 하지만 여름 시즌의 러프는 질기디 질겼다. 일단 러프에 들어가면 그린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러프 탈출만을 과제로 삼는 것이 현명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평소에는 사슴들로부터 홀 컵을 보호하기 위해 마개를 덮어놓기 때문에 그린에 오르면 씽크대 개수구 마개를 열 듯 뚜껑을 열고 퍼팅을 해야 하는데 우리가 방문한 날은 홀 컵 마개가 열려 있어 칩인샷도 하나 구사해냈다.

숲은 울창하디 울창했다. 아름드리 너도밤나무에 맞은 공은 한 번 만 부딪히고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따~다닥~닥~닥 쓰리쿠션 이상의 탄력으로 가지들을 맞고 떨어진 공은 들어간 위치에서 발견될 확률이 제로였다.

우리가 전체 코스 한 가운데에 있을 즈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바람이 몰아치더니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덴마크엔 비가 많지 않다는 소리를 들은 터라 금새 지나갈 것을 기대했다. 사실 피할 곳도 없었다. 코스 한 가운데라 클럽하우스로 되돌아가는 것도 힘들었고 비가 흔치 않아서인지 다른 나라에선 흔했던 움막도 없었다. 도저히 비바람을 견딜 수가 없어 한동안 코스 한 가운데에 둘이 마주서서 껴안다시피 각자의 등으로 바람을 막아냈다. 비바람이 몸이 휘청댈 정도라 몇 홀을 가로질러 너도밤나무 숲으로 향했다. 바람에 맞서 걸으려니 몸이 앞으로 45도는 기울어지는 듯 했고 얼굴을 때리는 비가 따가웠다. 그런데 나무 밑은 전혀 비에 젖지 않았다. 비가 한 방울도 새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나무들이었다. 그 아래에서 입었던 바람막이를 벗어 털고, 그립을 닦고 캐디백을 뒤집어 물을 빼고….

코펜하겐 골프장에서의 이 리얼 야생 버라이어티 골프를 통해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느낄 수 있었고 자연 앞에서 겸손해졌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가보고 싶은 나라로 덴마크를 꼽는 계기가 되었다. 늘 와일드한 코스를 좋아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환경에서의 골프를 선호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우리에겐 유목민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영국만으로는 모자라 유럽대륙까지 이어진 역마살 커플의 골프 스토리는 그렇게 덴마크에서 기대치 않았던 클라이막스를 맞이했다.

이다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