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호랑이해 신년콩트…'다시쓰는 호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백수의 왕인 호랑이는 그 성품이 어질고 지혜롭고 의롭고 용맹한 것으로 소문나 있다.

하지만 그것도 등따습고 배부르던 시절의 이야기일 뿐이다.

아예맵우 (IMF) 란 이름의 사상 유례 드문 폭풍우에 된통 맞아 황폐할 대로 황폐해진 갱제의 숲에서 노루나 멧돼지 같은 영양가 있는 먹이를 기대한다는 건 연탄재로 부침개를 만들어 먹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노릇이었다.

산토끼는 커녕 하다못해 들쥐 한 마리조차 상면하기 힘든 아예맵우 불황 속에서는 백수의 왕 아니라 그 할아비일지라도 달리 용빼는 재주가 없었다.

정축년을 가까스로 넘기고 명색이 범띠해인 무인년을 맞았는데도 허기진 호랑이의 뱃구레에서는 연신 도랑물 흐르는 소리만 청승스레 울려나왔다.

시장기를 견디다 못한 호랑이는 어슬렁어슬렁 갱제의 숲을 나와 마을쪽으로 향했다.

잘 생긴 도령이나 이쁜 아씨라도 한 마리 걸려든다면 얼마나 흐벅질까마는 이미 숲이 망가지고 그 숲에 기대어 살아가는 마을 또한 속속들이 망가졌는지라 도무지 찬밥 더운밥 가릴 게제가 아니었다.

여차하면 개라도 잡아먹고 개호주라는 불명예스런 별명마저 감수해야 할 판이었다.

강팍한 심정으로 먹이감을 찾던 호랑이 눈이 번쩍 뜨였다.

등산복 차림의 사내가 산을 향해 허위허위 올라오는 중이었다.

"네 이놈 잘 걸렸다.

" 발톱을 세우고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호랑이는 한바탕 으르렁 거렸다.

"지금이 어느 땐 줄 알고 산행을 즐기느냐. 남들 뼈빠지게 일할 시간에 한유하게 취미생활에 고부라진 걸 보니 불로소득자가 틀림없구나. 그 죄를 물어 널 잡아먹어야겠다.

" "때마침 잘 만났군요. 대왕님, 어서 절 잡수시지요. " 혼비하고 백산한 나머지 제풀에 생똥을 지릴 줄 알았던 사내가 깜짝 반색을 하면서 되레 어기차게 나왔다.

"그러잖아도 죽지 못해 살던 참인데 다행히도 이렇게 호환을 당하게 됐으니 오늘은 정말 일진이 좋은 날이군요. " 호랑이는 기가 막혔다.

"오래 살다 보니 별 해괴한 놈을 다 보는구나. 그렇게 호환을 자청하는 네놈은 대관절 웬놈이냐?" "세상 사람들은 저 같은 신세를 가리켜서 명퇴자라 부르더군요. 요번 아예맵우바람에 제 모가지가 뎅겅 날아갔답니다.

" "오오라, 그러니까 네가 바로 출근하는 척하고 집을 나와서 등산복 갈아입고 산에서 소일하다 내려간다는 바로 그 명퇴자로구나?" "맞습니다.

제발 적선하시는 셈치고 어서 절 한입에 삼켜주시지요. " 명퇴자란 말에 이미 입맛을 싹 잡친 뒤인지라 호랑이는 제 아가리에 머리통을 바싹 들이미는 사내를 보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내가 널 기필코 잡아먹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두 가지만 들어보아라. " "첫째는 충직성입니다.

박봉에도 불평 않고 청춘을 바쳐 한 직장만을 섬겼습니다.

둘째는 순결성입니다.

온갖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건사하려고 평생을 노력했으니 날것으로 드셔도 아마 비리지 않으실 겁니다.

" "틀렸느니라. 오늘날 충직은 무능으로 통하고 순결은 허약으로 통하는 세상이니라. 그 증거로 네 목이 잘리지 않았느냐. 네가 필시 날 독살할 셈이로구나. 네 몸은 시방 독물질로 그득 차 있다.

노력한 만큼 인정받지 못하고 수고한 만큼 대접받지 못한 분노, 억울함, 외로움, 자괴감 따위가 맹독으로 변해 너를 짓누르고 있다.

내가 아무리 주려 있다 한들 너를 삼켜 내 명을 스스로 재촉하겠느냐. " *** "대왕님, 제발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너를 그냥 보낼 테니 대신 다른 사람을 추천하거라. "

호환마저 비켜가는 자신의 불운을 한탄하고 나서 명퇴자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굶주린 호랑이를 위해 몇 사람을 차례로 추천했다.

그러나 산 너머 저쪽 골프장의 선남선녀들은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한 채 마치 자기네 머리통을 골프채로 쳐서 홀컵 안에 넣지 못해 안달이 난 듯이 과소비를 일삼는 어리석은 자들이라는 이유로, 학자는 학문을 통해 세상을 구하고 인류를 행복하게 만든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 공연한 이론으로 권력이 부를 날만 기다리는 거짓말쟁이요 기회주의자란 이유로 호랑이로부터 퇴박을 맞았다.

명퇴자가 마지막으로 종교인을 추천하자 호랑이의 인내심은 마침내 한계에 다다랐다.

"네놈이 정녕 나를 해코지할 생각이구나. 부정한 것들을 멀리하는 내 식성을 더 이상 모욕하면 네놈을 가만두지 않겠다!" 한바탕의 포효로 명퇴자를 꾸짖어 멀리 쫓아버리고 나서 호랑이는 마땅한 먹이감을 찾아 마을 외곽을 어정거렸다.

외딴 곳에 자리한 별장에 발길이 닿았다.

별장의 소유주는 제각각 아비가 다른 자식을 여럿이나 둔 돈 많은 경녀 과부였다.

때마침 지체 높은 정남 선생을 호젓한 별장으로 불러들여 벌건 대낮에 홀랑 벗은 채 안에서 수작을 나누는 중이었다.

"자기, 당분간은 만나지 말고 근신해야겠어요. 우리가 그렇고 그런 사이란 걸 사람들이 눈치채고 쑤군덕거려요. 아예맵우 폭풍우를 이땅에 불러들인 것이 마치 우리 책임이나 되는 듯이요. " "과부 돈벌이에 뒷배 봐주고 떡값 좀 얻어 쓴 것이 뭐가 그리 큰 잘못이라고 야단들이야?" "그러게 말예요. 유착이니 뭐니 떠들면서 모든 책임을 우리한테 덤터기 씌워 마녀사냥이 한창이라니까요. " "알았어. 여론이 잠잠해질 때까지 전혀 모르는 사이처럼 당분간은 덤덤하게 지내도록 하지. " "다 같이 책임져야 될 일을 괜히 우리만 갖고서 지랄들이야. " 창밖에서 그 꼴을 들여다보던 호랑이는 안방을 향해 냅다 으르렁거렸다.

난데없는 포효에 얼추 넋이 달아난 정남 선생과 경녀 과부는 다급한 김에 지붕으로 피신했다.

사색이 되어 덜덜 떠는 알몸의 남녀를 향해 호랑이는 분노의 고함을 올려보냈다.

"갱제의 숲이 누구 때문에 그렇게 황폐해졌는지 이제야 알겠다.

내가 지금 몹시 시장해서 너희들이라도 잡아먹어야겠다.

" 그러자 경녀 과부가 정남 선생을 손가락질하면서 읍소하기 시작했다.

"쇤네는 아무 잘못도 없사와요. 이 남자가 떡값을 안 내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을러메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어요. 이 남자를 잡아먹으세요. " 정남 선생 또한 경녀 과부를 가리키면서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정남과 경녀의 추악한 떠넘기기를 보고 호랑이는 그만 식욕을 잃어버렸다.

"참으로 가관이로다.

내 아무리 시장하기로 너희 같은 더러운 것들을 어찌 입에 대랴. 백수의 왕은 차라리 주릴지언정 썩은 것은 먹지 않느니라. " 침을 퉤퉤 뱉으면서 호랑이는 어슬렁어슬렁 발길을 돌려버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정남과 경녀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서로 상대방을 손가락질해가며 저쪽이 더 맛있다고 우김질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동네 꼬마가 그 꼴을 보고 별장집 지붕을 향해 소리쳤다.

"거기서 왜들 그러고 계세요?" 비로소 눈을 뜬 정남은 호랑이가 사라진 줄 알고 꼬마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떼끼놈, 별을 보러 올라왔다!" "별을 보러 대낮에 홀랑 벗고 지붕 위에 올라간 사람들 처음 보네. "

윤흥길〈소설가·호서대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