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정축년,소도 사람도 울었다…사료값 뛰어 키워봤자 빚더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소의 해 정축년 (丁丑年) 이 저물어가는 30일 오전 서울송파구 가락동농산물시장안 축협공판장 도축장 주변. 3~10여마리씩 소들이 실려있는 30여대의 트럭이 줄지어 선 한쪽 편에서 소를 가져온 축산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른 아침부터 소주잔을 들이키고 있다.

경북 문경시에서 3마리를 싣고 지난 28일 서울로 올라온 민영석 (閔永錫.45) 씨는 "트럭 운전석에서 이틀밤을 지새고서야 방금 소들을 계류장에 넣었다.

1백50만원을 주고 송아지를 사서 1년 반동안 1백만원이 넘는 사료값을 들여 길렀는데 2백만원밖에 받지 못해 억장이 무너지지만 사료값이 더 오른다고 하니 이젠 미련도 없다" 며 무겁게 발걸음을 돌렸다.

하루 3백50마리로 도축을 제한하고 있는 축협공판장에는 최근 '홍수출하' 로 트럭을 주차장과 인근 도로에 세워놓고 2~3일을 기다리는 광경이 연출되고 있다.

지방 도축장에서는 아예 경매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서울로 몰려드는 바람에 서울 마장동과 독산동의 도축장도 장사진을 이루기는 마찬가지. 도축 접수를 받는 김봉환 (42) 씨는 "이달초부터 하루 7백~8백마리씩 몰려오더니 중순부터는 1천마리 가까운 소가 계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며 "추석이나 설 등 명절 목전 말고는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며 기가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경기도 안성에서 6마리를 싣고 온 박성의 (朴成義.55) 씨는 "사료값이 이미 40% 올라 25㎏ 배합사료 한 포대에 9천원대가 되는 바람에 늘어나는 빚을 감당할 수 없었다" 고 말했다.

朴씨는 "소값 1천여만원으로 농협 빚 6백만원, 사료비 2백여만원을 갚고 나면 이번에 대학 들어간 아들 등록금도 안남는다" 며 거칠게 갈라진 손으로 술잔을 기울였다.

이날 축협의 경매시세는 5백㎏ 한우 수소 1등급이 2백20만원선. 지난달보다 20만원, 지난해 12월보다는 55만원이 떨어진 금액이다.

축협은 최근 '환율이 올라 수입육 가격이 오르기 때문에 몇달만 기다리면 제값을 받고 팔 수 있다' 는 내용의 홍보물을 농가에 돌리며 소 투매를 말리고 있지만 지난달과 이달 전체 사육우의 8%에 해당하는 20만마리의 소가 도축장으로 끌려왔다.

"소.돼지 다 팔고 이제 뭘 해야 할지…. " 축산인들의 푸념과 느닷없이 들이닥친 운명을 예감한 소들의 물기어린 눈망울이 그득한 도축장의 풍경. 갑자기 추락한 우리 사회의 우울한 97년은 이렇게 저물고 있다.

이상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