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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농구·야구의 아버지 필립 질레트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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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호 06면

YMCA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주요한 스포츠 경기의 상당수를 도입하고 보급한 스포츠의 메카다. 야구뿐 아니라 농구·체조·수영 등 근대 스포츠의 도입과 보급에 YMCA의 기여는 절대적이었다. 야구는 1905년, 농구는 1907년, 스케이트는 1908년 처음 소개됐다. 탁구와 육상 경기를 회관 앞 가건물에서 열기도 했고, 활동이 왕성해지자 1916년 최초의 실내체육관을 개관한다.

필립 질레트(사진)는 야구와 농구 보급에 헌신한 인물로서 한국 야구 100년사와 농구 100년사에 모두 등장한다. 예일대 시절 풋볼과 야구 선수로 활약한 질레트는 1904년 YMCA 임시회관으로 사용 중이던 서울 인사동 태화관 앞에서 미국인들이 캐치볼하는 모습에 사람들이 큰 관심을 보이자 야구를 선교 수단으로 삼기 위해 야구용품을 미국에 주문한다.

1906년 3월 15일 현재의 동대문구장 자리인 훈련원 마동산에서 한국 최초의 야구경기인 황성YMCA와 덕어(독일어)학교의 경기가 열린다. 질레트는 1910년 한일병합이 되자 청년들의 의기를 되살리기 위해 야구 전파에 더욱 노력한다. 1911년 6월 관립 한성고·선린상업의 연합팀과 실업 연합팀의 경기를 주선했고, YMCA 야구 및 축구팀의 지방 원정을 성사시켜 각 지방에 스포츠를 전파했다.

그러나 질레트는 일제의 탄압으로 한국을 떠난다. 1912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인 ‘105인 사건’이 터지자 총독부는 윤치호 YMCA 부회장을 주동자로 몰아 수감한다. 질레트는 사건 전모를 기록한 보고서를 영국의 국제기독교선교협회로 발송했다. 그런데 이 문서가 중국 신문에 공개됐고, 총독부는 YMCA 측에 질레트의 사퇴를 강요한다. 결국 질레트는 1913년 중국으로 떠났고, 1939년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005년 한국 야구 100주년 행사를 준비하던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질레트의 혈육을 수개월간 수소문한 끝에 콜로라도에 사는 외손자 로런스 허버드를 찾아냈다. 박용오 KBO 총재가 3월 31일 허버드를 국내로 초청해 공로패를 수여했고, 허버드는 4월 6일 문학경기장에서 열린 SK와 KIA의 경기에 시구자로 나섰다. 질레트가 첫 공을 뿌린 지 100년 만에 외손자가 역사적인 시구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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