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굴욕에 굴하지 않는, ‘속물 부인’의 대책 없는 발랄함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10호 03면

‘내조(內助)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은 고루해 보이고 ‘아줌마’ 드라마라는 장르는 진부하게 들렸다. 그런데 극성스러운 아줌마들의 모임인 ‘와이프 커뮤니티’ 속에서 벌어지는 속물들의 경쟁이 이렇게 경쾌한 코미디가 될 줄은 몰랐다. ‘꽃남’이 지나간 자리, 허전함을 달랠 새도 없이 다가온 ‘내조의 여왕’이 힘겨운 일상의 무게를 날려 버리며 주초의 저녁을 즐겁게 만들고 있다.

드라마 ‘내조의 여왕’

천지애(김남주 분)는 여지없는 속물이다. 여고 시절 예쁜 얼굴 하나만 믿고 못난 친구 무시하고, 가진 것 없는 30대가 돼서도 친구들 약점만 보이면 금세 허세의 콧대를 세운다. 그런가 하면 백수 남편 진급시키기 위해서라면 급작스러운 눈물을 쏟아내거나 맨바닥에 무릎 꿇기도 불사한다. 그런 속물 아줌마가 군대를 방불케 하는 계급 조직 ‘평강회’의 살벌한 경쟁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선수가 제대로 된 링을 만난 셈이다. 묘한 기시감을 주는 상황 속에서 천지애의 캐릭터를 조금씩 과장하자 커다란 웃음 포인트가 생겨났다. 말하자면 이 드라마는, ‘하얀 거탑’의 현실을 ‘분장실의 강선생님’ 버전으로 풀어낸 코미디다.

하지만 세상은 간단치 않다. 극성과 오버만으로 경쟁에서 승자가 되기엔 힘에 부친다. 성공의 문은 단단히 닫혀 주인공을 종종 좌절시킨다. 그의 의지가 팍팍 꺾이는 부분에서 드라마는 웃음과는 또 다른 ‘공감’의 포인트를 잡아낸다. 천지애가 피부관리실에서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야 했을 때. 옛 애인이었던 부장과 주먹다짐을 한 남편에게 “사과해!”라고 소리 지를 때, 여전히 무겁기만 한 조직의 힘 앞에 굴복해야 했을 때. 고단한 현실과 허리 숙여 악수해야 하는 소시민의 애절한 진심이 짠하게 전해온다.

코믹한 과장으로 펄펄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가벼운 웃음은 곳곳에 배치한 굴욕의 순간에 의해 무게중심을 잡으며 현실의 중력을 인식시킨다. 극성스러운 내조 하나만으로 신데렐라 성공 스토리를 손쉽게 써 내려갈 듯했던 드라마가 좌절감을 곱씹어야 하는 약자의 편에 서 있음을 보여 주는 장면들이다. 시청자는 허무맹랑한 남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던 드라마에 자신의 처지를 비춰 보며 공감한다.

‘내조의 여왕’의 성공 포인트는 절묘한 균형감각에 있다. 현실을 과장해 웃음을 끌어내지만 그렇다고 웃음을 위해 현실감을 잃어버리는 기존 코믹 드라마의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또 코믹함의 가벼움을 상쇄하기 위해 억지 감동을 짜내지도 않는다. 드라마가 그리는 현실은 차갑고 우울하지만 그 현실을 어두운 톤으로 재현하는 리얼리티에 몰두하기보다는 그걸 상큼한 유머로 바꾸어 버린다.

주인공들이 얽혀 들게 되는 현재와 과거의 연인 관계에서도 무리하지 않는다. 천지애는 남편 회사 부장과는 첫사랑이었고 사장과는 미묘한 동경의 관계에 있으며 그의 남편은 사장 부인의 짝사랑 대상이다. 얽히고설킨 관계는 불륜 드라마나 막장 드라마를 연상시키지만, 이 드라마는 결코 적정한 선을 넘을 의도를 보이지 않는다. 대신 남편에 대한 주인공 천지애의 순정을 강조하면서 보수적인 드라마의 기조를 유지한다.

이 때문에 시청자는 눈물 찔끔 흘러나올 듯한 냉혹한 리얼리티를 실감하면서도 우중충한 기분을 느끼지 않고, 한편으로는 넘어지고 자빠지는 우스운 연기에도 비웃음을 날리지 않게 된다. 또 그들의 ‘다각’ 연애를 보면서도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다.

대신 그들을 보며 30대 또래들이 느낄 만한 감정들, 이를테면 지나간 사랑에 대한 회한이나 내 뒤에서 보이지 않게 힘든 현실을 도와줄 키다리 아저씨 같은 남자를 만나는 소박한 환상을 떠올리는 것이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면서도 다시 현실로 돌아와 그걸 확인하게 만드는 온건함이 이 드라마를 부담 없는 편안한 마음으로 즐기게 만든다.

천지애와 양봉순(이혜영)의 명확한 대결 구도, 짜임새 있는 캐릭터, 한발 앞선 대사들로 매회 다른 시트콤 한 편씩을 보는 듯한 밀도 있는 전개 역시 ‘내조의 여왕’의 힘이다. 주인공 이야기 한 신, 조연들 이야기 한 신 하는 식으로 느슨하게 시간을 끌어가는 범작들에 비해 타이트하게 스토리에 집중한다. 낭비 되지 않은 신들은 주제와 연관돼 있으며, 잘 빚어진 주·조연 캐릭터들은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고단한 대한민국의 현재 상황에서 모범 답안이 될 만한 캐릭터인 ‘천지애’ 하나만으로도 이 드라마는 볼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그 많은 수모와 멸시에도 분노에 떨거나 복수를 꿈꾸지 않는 이 대책 없는 긍정성과 발랄함에 아마도 시청자는 두 손을 든 것이 아닐까.

어려움에는 지독한 성실함으로 맞서고, 꺾이는 자존심에는 눈물 한 방울 흘려 주는 것으로 끝내 버리고, 돌아서면 또 어디선가에서 특유의 밉지 않은 가식과 허세와 극성으로 버텨 나가는 ‘사랑스러운 속물’ 천지애. 그 앞에서는 캄캄한 현실도 환한 꽃밭이 되는 듯하다. 시청자들은 그녀를 보면서 힘든 이 세상을 살아 나가는 지혜를 얻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