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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과 소통으로 내 안의 自然을 깨워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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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호 10면

마음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 있으므로 공부도 두 갈래다. 한편으로 ‘위태로운 인심’을 제어하고, 또 한편 ‘은미한 도심’을 키워 나간다. 전자를 ‘인욕을 막는 (人欲)’, 후자를 ‘천리를 보존하는 길(存天理)’이라고 부른다.

한형조 교수의 교과서 밖 조선 유학

1. 제어의 길
‘심학도’의 아래 그림에서 오른쪽 라인이 ‘제어’의 길이다. 그 길에 놓인 디딤돌을 보자. 신독(愼獨)-홀로 있을 때를 경계하고, 극복(克復)-사적 충동을 억제하며, 심재(心在)-마음을 굳건히 지키고, 구방심(求放心)-집 나간 마음을 찾아오며, 정심(正心)-정동의 편견에 지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훈련을 거쳐 도착하는 종착지에는 사십부동심(四十不動心)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맹자가 마흔에 도달했다는 그 경지, 외적 유혹과 강제에 흔들리지 않고, 내적 수동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이 영혼의 아파테이아(apatheia)는 스토아의 황제와 노예 철학자가 꿈꾼 곳이기도 하다. 결코 도달하기 쉽지 않다.

맹자는 눈앞에 어른거리는 칼끝을 피하지 않는 어느 무사의 용기를 적어 두었다. 노예 철학자는 다리를 비트는 주인에게 “그러시면 제 다리가 부러질지도 모릅니다”고 남의 일처럼 말했고, 결국 다리는 부러졌다. “거 보십시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더 비틀면 부러질 거라고 했잖아요.”

2. 함양(涵養)의 길
그럼에도 이 지독한 평정은 다만 길의 절반일 뿐이다. 공자는 억압과 차단이 ‘휴매니티(仁)’의 끈을 놓칠 때 인간을 목 조를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이 때문에 유학은 스파르타를 기리지 않고 묵자에 편입되지 않았다.

‘심학도’의 왼쪽 라인을 보자. 그것은 인심의 발호에 눌리고 가려진 본심[道心]을 발양하는 훈련이다. 그 길에 놓인 돌다리들은 다음과 같다. 계구(戒懼)-두려운 마음으로 자기 속을 살피고, 조존(操存)-미약한 내면의 불씨를 꺼지지 않도록 보존하며, 심사(心思)-진정한 인간의 가치에 대해 성찰하며, 양심(養心)-그 마음을 키워 대지를 적시고 들판을 태우도록 하며, 진심(盡心)-마음의 본래 지식과 힘을 충분히 발휘한다.
이 훈련들이 유학이 목표하는 지점으로 이끌 것이다. 그곳은 어디인가.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공자가 나이 일흔에 얻었다는 대자유의 경지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규범과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여기 자유란 말은 어폐가 있다. 정확하게는 ‘자연(自然)’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 내 안의 빛과 힘을 의도나 계산 없이 최고도로 발현하는 것, 『중용』이 ‘생각하지 않아도 길이 보이고(不思而得), 애쓰지 않아도 몸이 길을 따르는(不勉而中)’ 이곳이 유학의 이상이다. ‘도법자연(道法自然)’을 말하는 노자처럼 주자학도 인간의 길의 최종 목적지가 내 몸의 자연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3. 측은지심, 공감과 소통의 힘
자기 안의 ‘자연’이 궁금한 사람이 많겠다. 여러 갈래인데, 핵심은 ‘공감’과 ‘소통’이다. 맹자가 예시한 사단(四端) 가운데 맨 처음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그것이다. 남의 고통에 아프고, 기쁠 때 웃어주는 공감(sympathy)의 능력은 냉담과 이기에 마비되고, 단편화와 물신주의의 거센 파도에 휩쓸려 가 버렸다.

유학의 프로젝트는 이 ‘소외’의 극복, 그것 하나를 겨냥한 설계와 전략 매뉴얼이다. 공감과 소통의 능력이 없으면 가까이는 가정에서 의미 있는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사회적 공간에서 책임 있는 존재로 거듭날 수 없다. 역시나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연속되어 있다. 현대 리더십의 요체 또한 이 근처에 있으니 유학은 현대의 경영에도 근본적이고 풍부한 조언을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4. 논리와 실효 사이
이 그림은 주자 심학(心學)의 기본 설계를 축약하고 있다. 그렇지만 세부 구성은 논란거리였다. 퇴계가 이 그림을 ‘성학십도’ 안에 채택하자 젊은 율곡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당시 퇴계 68세, 율곡 33세였다.

율곡은 항목들의 배치를 하나하나 문제 삼았다. 예를 들면 1)위 그림의 대인심(大人心)은 성숙의 최고봉인 점에서 기본 조건을 말하는 본심이나 양심·적자심과 한자리에 놓일 수 없고 2)또 아래 구방심은 공부의 첫걸음에 해당하는데, 그림에는 중간쯤, 그것도 극복의 아래에 배치된 것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극복이란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줄임말로 공자가 안연에게 전한 공부의 요체이니 단계나 비중으로 보아 ‘집 나간 마음을 챙기라’는 구방심 앞에 놓일 군번이 아니라는 것이다.

퇴계는 그림의 항목들이 인과적 연관이나 단계적 진전으로 조직된 것이 아니라고 운을 뗐다. 그것들은 바둑판처럼 그저 ‘나열되고’ 배치되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체계와 연관은 부실해도 각각의 항목은 실제 ‘공부’를 통해 시너지를 발휘하게 될 것이고, 그걸로 족하지 않으냐는 것이다.

퇴계는 논리적 연관이나 이론적 정합성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양명학적 혐의에도 불구하고 『심경』을 채택했고, 아무리 번잡해도 제자들이 함부로 편집에 손대지 말게 했다. ‘심학도’의 항목들 또한 좀 느슨해도 그대로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엉성한 ‘심학도’를 내버리자는 율곡을 향해 퇴계는 따끔한 충고를 던졌다.

“늘 보니 선배들의 글에서 틀린 곳을 붙들고 비난과 배척을 일삼더라. 상대방이 도무지 입도 다시 떼지 못하도록 몰아붙이는데, 그 병폐를 고쳐야 공부에 진전이 있을 것이다.”
어떨까. 논리적 일관성과 잘 짜인 체계가 철학의 중심인가. 아니면 공부에 굳이 논리와 체계를 고집할 필요가 없는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전한학과 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주희에서 정약용으로』『조선유학의 거장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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