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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파리의 마약 퇴치 모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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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 한 남자가 마약퇴치 운동단체인 ‘익명의 마약 중독자’ 게시판을 보고 있다.

25일 오후 8시 파리 16구에 있는 한 성공회 교회 회의실. 서른 명쯤 되는 사람들이 사각 탁자 주변에 빙 둘러앉았다. 이들은 엄숙한 표정으로 준비된 순서를 진행해 나갔다.

'NA'(Narcotics Anonymous: 익명의 마약 중독자) 클럽의 회원들이다. 과거에 마약에 깊이 빠졌거나, 지금도 마약의 늪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먼저 "왜 우리가 오늘 여기에 모였나"라고 합창했다. 이어 NA의 12가지 치료 단계와 12가지 전통을 돌아가면서 읽었다. 곧이어 헬렌(가명)이 마약과 싸워온 경험담을 얘기했다.

사회자는 서른이 훨씬 넘어보이는 헬렌을 가리키며 "그녀가 오늘로 16번째 생일을 맞았다"고 소개했다. 마약을 끊은 지 16년이 됐다는 뜻이다. 헬렌도 "오늘은 내가 다시 태어난 날"이라며 기뻐했다.

헬렌은 10대 시절 호기심에 못이겨 마약에 손댔다. 그리고 금세 중독자가 됐다. NA를 알게 된 건 헬렌의 행운이었다. 헬렌은 경험자들의 도움으로 죽음보다 무서운 마약의 수렁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헬렌이 지금도 이 모임에 꼬박꼬박 나오는 이유는 단 하나, 마약에 대한 경계심을 굳게 다지기 위해서다. 아직도 마약의 유혹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얘기다.

헬렌의 얘기가 끝나자 다른 참석자들이 자신의 느낌을 얘기했다. 발언자가 자신을 소개하면 모든 사람은 그 이름을 부르며 연대의식을 표시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먼저 헬렌의 '생일'을 축하하고 나서 헬렌의 얘기를 듣고 느낀 것, 그리고 자신의 경험과 앞으로의 각오 등을 말했다. 90분이라는 긴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파리에서만 NA 모임이 일주일간 39군데에서 열린다. 지방 모임도 36차례다. 전화상담과 사이트(www. nafrance. org)를 통한 e-메일 상담 창구도 열려 있다.

프랑스국립통계청(INSEE)에 따르면 2002년 현재 프랑스 국민 가운데 대마초.헤로인.코카인.엑스터시 등 마약류 복용경험이 있는 사람은 1100만 명이다. 이 중 340만 명은 1년에 한 번 이상 마약류를 복용하고 100만 명은 정기적으로 대마초를 흡입한다.

이날 성공회 교회에서 모임을 가진 NA 회원들은 헤어지기 전 어깨동무를 하면서 다짐을 나눴다. 만났을 때와는 달리 표정이 무척 밝았다. 자신에 대한, 그리고 서로에 대한 약속을 가슴에 품은 채 일주일 뒤 다시 만나기로 하고 이들은 밤거리 속으로 조용히 흩어졌다.

파리=박경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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