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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디 구하기 별따기 … 아빠들이 나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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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국 여자골프를 이야기할 때 항상 빠지지 않는 단어는 바로 ‘아버지’다. 미국 LPGA 투어 진출 1세대들인 박세리·김미현·박지은·한희원·장정 등의 성공 뒤에는 ‘골프 대디’들이 있었다. 최근 국내 프로골프가 활성화되면서 아버지들은 후원자로 그치지 않고 딸의 캐디백을 직접 메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른바 ‘캐디 대디’다.

김하늘(엘로드)의 아버지 김종현(46), 김보경(던롭피닉스)의 아버지 김경원(52), 홍란(먼싱웨어)의 아버지 홍춘식, 정혜진의 아버지 정종철씨 등이 대표적이다. 17일 끝난 롯데마트 여자오픈에 참가한 100명의 프로들을 조사해 본 결과 아버지가 캐디를 맡고 있는 ‘캐디 대디’가 30%나 됐다. 이들 중에는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딸을 위해 아예 캐디로 전업한 경우도 여럿 있다. 서귀포에서 열린 이번 대회는 한라산 브레이크로 불리는 착시 현상 때문에 골프장에 소속된 하우스 캐디(20명)를 고용한 경우가 많았다. 일반 대회에는 절반이 넘는 선수들이 아버지 캐디를 동반한다.

◆좋은 캐디 없나요=‘캐디 대디’가 늘고 있는 것은 국내에 전문 캐디가 드물기 때문이다. 시장이 좁은 데다 선수들 상금이 적어 캐디 지원자가 거의 없는 형편이다. 그렇다고 골프장 소속 하우스 캐디들이 선수들의 가방을 메고 싶어하는 것도 아니다. 일당 15만원으로 아마추어 골퍼들의 캐디 봉사료(약 10만원)에 비해 크게 높지도 않으면서 신경 쓸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우스 캐디를 하다가 전문 투어 캐디로 나선 지은희(33)씨는 “수도권 골프장의 경우 성수기에는 수입이 월 400만~600만원 정도 된다. 몸도 고되고, 신경을 곤두세워가면서 수입도 보잘것없는 프로 캐디를 맡고 싶어하는 도우미들은 많지 않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직접 캐디를 맡는 이유다.

◆한 푼이라도 아껴야죠=캐디 대디가 늘어난 것은 전문 캐디를 구할 수 없는 환경 탓도 있지만 경제적인 이유 또한 무시할 수 없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KLPGA투어의 대회 수는 8~12개 정도였다. 하지만 2000년 이후에는 16~20개로 늘어났다. 지난해 국내 대회 수는 26개였다. 보통 3라운드를 기준으로 하우스 캐디를 쓸 경우 하루 15만원씩 약 45만~50만원 정도를 줘야 한다. 여기에 성적이 좋으면 별도의 보너스도 지급해야 한다. 일 년에 투어 경비는 캐디피를 포함해 평균 5000만원 정도 소요된다. 총상금 3억원짜리 대회의 경우 30위 상금이 240만원인 것을 감안하면 캐디피도 부담스럽다는 이야기다.

◆술·담배 끊는 부모 많아=캐디는 체력과 골프에 대한 전문 지식을 겸비해야 한다. 15㎏이 넘는 프로들의 캐디백을 메고 18홀(10㎞ 정도)을 돌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 무더위에 비닐로 된 조끼를 입고 18홀을 돌고 나면 웬만한 사람은 탈진 상태에 빠진다. 그러다 보니 캐디를 맡으면서 술· 담배를 끊는 아버지들도 많다. 서희경·김보경의 아버지도 딸의 캐디를 하기 위해 담배를 끊었다. 선수들이 겨울 훈련을 하듯 ‘캐디 대디’들은 평소 등산 등으로 체력을 다진다. 대회 중에는 코를 심하게 고는 캐디 대디들이 모여 한 방을 쓰기도 한다.

◆캐디 대디는 괴로워=아버지 캐디는 딸과 마찰을 빚는 경우도 종종 있다. 특히 프로 데뷔 1~2년차에 이런 현상이 심하다. 바로 곁에서 딸의 플레이를 지켜보다 화를 참지 못하는 것이다. 딸과 아버지는 거리를 측정하고, 퍼팅 라인을 읽을 때 많이 다툰다. ‘캐디 대디’들은 “아빠 말을 들으라”고 호통을 치고, 선수는 “아버지가 간섭이 심하다”며 반발하는 경우다. 아버지가 자기 나름대로 코치를 하다 말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라운드 도중 딸과 싸우고 가방을 놓고 가는 캐디 대디도 간혹 있다. 김보경의 아버지 김경원씨는 “처음에는 실수도 많이 했다. 최소한 경력이 2년은 돼야 ‘캐디 대디’도 전문성을 갖추게 된다”고 말했다.

제주=문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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