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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 살리고 이념 갈등 풀 열쇠 ‘휴먼 뉴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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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역사적으로 사회복지정책의 발전은 경제위기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16세기 후반 식량 가격의 폭등과 모직공업의 불황은 영국에서 복지제도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구빈법(救貧法)을 탄생시켰고, 산업화에 따른 노동자 계급의 급신장과 진보정당의 약진은 1900년을 전후로 독일과 영국 등 당시 선진공업국들이 사회보험제도를 앞다투어 도입하는 계기가 됐다. 미국에서도 29년 경제대공황을 계기로 ‘뉴딜’이라는 이름으로 노령연금 등 사회보장제도가 도입됐다. 한국에서는 60년대 이후 산업화가 급진전되면서 사회보장제도가 꾸준히 발전돼 왔다. 특히 97년 외환위기는 실업자를 위한 고용보험의 범위가 확대되고 지원 내용도 크게 강화되는 계기가 됐다.

현재 진행 중인 세계 금융위기도 한국에서 복지정책이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지난달 23일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는 최근 경제위기로 붕괴 조짐을 보이는 중산층을 살리기 위한 ‘휴먼뉴딜’ 정책을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휴먼뉴딜’은 이미 발표된 ‘녹색성장’ 정책과 함께 현 정권 국정 운영의 ‘양대 축’이 될 것이라고 한다.

MB 정권이 ‘녹색성장’과 ‘휴먼뉴딜’을 새로운 국정목표로 제시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는 현 정부의 국정기조가 ‘작은 정부’와 ‘경제효율’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보수적 입장에서 ‘성장과 환경의 조화’ 그리고 ‘성장과 복지의 조화’를 중시하는 보다 균형적인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경제위기는 경제정책을 추진함에 있어 ‘효율’과 ‘형평’ 간 균형을 이루게 하는 역할을 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산업화의 급진전은 새로운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형평’ 문제를 의식한 사회복지제도가 발전했다. 이러한 사회복지시책들은 진보정권에 의해 주도되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 보수정권 스스로 국민적 지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됐다. 보수 기치를 높이 들고 출범한 현 정권이 ‘휴먼뉴딜’을 국정 목표로 제시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는 매우 심각한 보수와 진보 간 갈등을 겪어 왔다. 특히 외환위기가 진정된 후 출범한 노무현 정권은 정책 추진에 있어 보다 확실한 진보 성향을 고집했고, 이는 보수 세력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했다. 노무현 정권의 실책에 힘입어 집권에 성공한 이명박 정권 역시 집권 초 미국 쇠고기 수입 등의 과정에서 진보 세력의 강한 반발에 부딪쳐 국정 운영에 많은 차질을 빚게 됐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의 경제위기와 ‘휴먼뉴딜’로 상징되는 더 균형된 국정목표의 설정은 ‘성장’과 ‘복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경제적 효과 외에도 보수와 진보 간의 반목과 대립을 완화시키는 정치사회적 효과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휴먼뉴딜’ 정책의 구체적 내용을 만들고 이를 정부정책으로 확정하는 과정에 다양한 계층의 참여를 보장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휴먼뉴딜’ 작업의 주체가 될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를 확대 개편하고, 더 폭 넓은 토론 과정을 거쳐 그 내용을 정부안으로 확정할 것을 건의한다.

서상목 인제대 석좌교수